[美서 의문사 손선녀씨의 일생]"고통과 비극의 27년"

  • 입력 2001년 6월 14일 18시 40분


《어린 시절 생모의 미국행과 아버지의 죽음, 옷가게에서 일하면서 키워온 모델의 꿈. 친구들과의 해외여행과 비행기 추락사고, 이로 인한 전신 중화상. 600만달러의 배상금 수령과 미국행, 백인과의 결혼 및 남편의 상습 폭행, 그리고 의문의 죽음…. 97년 8월 대한항공(KAL) 여객기 괌 추락사고에서 극적으로 살아남은 뒤 미국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 손선녀씨(27·본보 14일자 A31면 보도)의 짧은 인생은 말 그대로 고통과 비극의 연속이었다.》

그는 지난해 여름 국내의 유일한 혈육인 언니(33)와 오빠(30)에게 보낸 편지에서 ‘지옥 같은 곳’(한국)에서 탈출해 미국으로 갔지만 미국에서도 ‘말로 표현이 안되는 고통’을 겪었다고 하소연했다.

“내가 여기서 받은 고통들을 생각해보면 말로 표현이 안된다는 것을 언니는 잘 알고 있을 거야…. 우리(언니, 오빠, 나)는 그 지옥 같은 곳에서 같이 고생한 피를 나눈 형제라는 것을 잊지마.”

그는 이어 “다른 사람은 다 필요 없고 식구는 우리 셋밖에 없다는 것을 명심해”라며 거센 세파에 시달린 뒤 오로지 혈육에게 마음을 의탁하려는 다짐을 힘주어 강조했다.

손씨의 오빠는 14일 “동생이 평생 겪은 것은 가난과 외로움, 고통뿐이었다”며 “어떻게, 왜 죽었는지 진상이 밝혀지지 않으면 동생이 제대로 눈을 감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손씨는 74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채 철이 들기도 전에 이별과 고통이 그를 먼저 찾아왔다. 3세 때 부모가 이혼하고 어머니는 주한미군 병사와 결혼해 미국으로 떠났다. 그러나 아버지마저 14세 때 사망, 손씨는 사실상 고아가 됐고 언니의 보살핌으로 인천에서 겨우 중고교를 마쳤다.

손씨는 학교졸업 후 서울 동대문 의류상가에서 언니의 옷가게 일을 도와주면서 모델의 꿈을 키웠다. 손씨의 언니는 “동생이 얼굴도 예쁘고 노래도 잘 불러 주변에서 인기가 많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97년 8월 친구들과의 괌 여행은 그에게 엄청난 비극을 안겨주었다. 228명이 사망한 KAL기 추락사고에서 그는 구사일생으로 목숨은 건졌지만 전신에 3도의 중화상을 입었다.그는 의식불명의 상태로 귀국했다. 화상뿐만 아니라 척추뼈가 어긋났고 갈비뼈도 여러 개 부러진 상태였다. 그 갈비뼈에 찔려 왼쪽 폐도 손상됐다. 당시 의사들은 “죽었다고 생각하고 마음을 편히 가지라”고 가족들을 달래기도 했다. 그는 10개월 동안 서울 한강성심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았다.

언니와 오빠의 지극한 보살핌 덕분에 새 생명을 얻기는 했지만 온 몸의 60%정도에 지독한 화상의 상처가 남았다. 그 이후 그는 수영장에도 가지 못했다. 남의 눈도 피하고 싶었지만 녹아 내린 피부에 물은 치명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대한항공은 손씨에게 2억5000만원 상당의 배상금을 제시했지만 손씨는 이를 거부하고 미국 법원에 소송을 낸 뒤 지난해 3월 미국 정부와 600만달러의 배상금 지급에 합의했다.

손씨는 소송이 진행 중이던 99년 12월 생모와 20여년 만에 연락이 닿아 생모가 있는 미국 테네시주 녹스빌시로 떠났다. 손씨는 이후 미국에서 화상 상처를 치료하다가 미국 현지의 헬스클럽에서 미국인 숀 마이클(34)을 만났다.

그와 결혼한 것은 지난해 6월. 손씨의 미국 법원 소송을 맡았던 법무법인 ‘대륙’의 존 김(한국명 김준민)변호사는 “손씨의 남편은 일정한 직업이 없고 마약 전과가 있는데 손씨가 그런 사실을 잘 몰랐던 것 같다”고 말했다. 김변호사는 또 “미국인 남편은 손씨와 한때 헤어졌다가 배상금을 받은 뒤 결혼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신석호·이명건기자>kyle@donga.com

▼美경찰, 남편에 시체인도 중지명령▼

대한항공(KAL) 여객기 괌 추락사고로 미국 정부로부터 600만달러의 배상금을 받은 뒤 의문의 시체로 발견된 손선녀씨 사건과 관련해 미국 경찰이 손씨의 미국인 남편에게 시체를 넘겨주지 말라는 결정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사건을 맡고 있는 법무법인 ‘대륙’의 존 김(한국명 김준민) 변호사는 14일 “손씨의 남편이 손씨 시체를 인수해 화장하려 했지만 미국 테네시주 녹스빌시 로펌(법률회사) 변호사들과 협의해 미국 경찰에 제기한 ‘사체인도중지 신청’이 받아들여졌다”고 전했다.

▽허술한 미국경찰 수사〓 김 변호사는 “손씨 사망 직후인 10일 오전 8시경(현지시간) 미국 경찰의 의뢰로 부검이 실시됐으나 수박 겉 핥기식으로 진행됐다”며김 변호사는 “미국 경찰은 손씨 사망 직후 부검담당 의사에게 손씨가 자연사한 것으로 통보했고 이에 따라 부검의사도 형식적으로 부검을 실시했다”며 “15일 손씨의 오빠와 함께 미국 현지로 가서 재부검을 요청하겠다”고 말했다. “이같은 사실을 현지 변호사들이 부검의사에게서 직접 확인했다”고 전했다.

김 변호사는 “미국 현지 변호사들을 통해 확인한 결과 손씨는 시체로 발견되기 7∼8시간 전쯤 살해돼 수영장에 버려진 것 같다”며 “발견 당시 손씨의 머리에 폭행의 흔적으로 보이는 야구공 크기 만한 혹이 있었다”고 전했다.

김 변호사는 “손씨의 배상금 상속을 노린 미국인 남편의 범행 가능성에 대해 철저한 수사가 이뤄져야 한다”며 “그러나 상속과는 관계없이 손씨가 남편의 마약거래 혐의를 고발한 것이 화근이 돼 마약조직 등에 의해 살해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손씨의 타살 근거로는 손씨가 죽기 일주일 전 주변에 “무섭다. 죽을 것 같다”는 말을 했으며 남편은 손씨의 사망 후 경찰이 들이닥치는 순간 결혼계약서를 손에 쥐고 있다가 경찰에 빼앗긴 점이 지적되고 있다.

▽재산관리계약과 상속문제〓 손씨는 지난해 6월 미국인 숀 마이클(34)과 결혼하면서 결혼 전 소유하고 있던 각자의 재산은 결혼 후에도 각자 관리하며 이혼이나 사망시에도 각자의 재산으로 취급한다는 내용의 ‘결혼계약서’를 작성한 사실이 밝혀졌다.

이 계약서에 따르면 손씨는 250만달러 상당의 유가증권과 예금, 50만달러 상당의 저택, 150만달러 상당의 연금 등 자신의 재산을 남편 재산과 독립해 스스로 관리하도록 되어 있다. 이에 따라 손씨의 남은 재산을 남편이 상속하게 되는지에 대해 미국 법정에서 논란이 벌어질 것으로 보인다.

손씨는 지난해 말 국내에 있는 언니(33)와 오빠(30)에게 보낸 편지에서 “여기(미국)에서 받은 고통을 생각하면 말로 표현이 안된다”며 남편과의 결혼생활이 순탄치 못했음을 고백했다.

<이수형기자>soo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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