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입력 2001년 5월 31일 18시 32분
공유하기
글자크기 설정
우리나라 사람치고 풍수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남한은 물론이고 북한 사람들도 풍수에 관심이 매우 높다. 양자의 공통점은 풍수를 무시하지 못하면서도 공식적으로는 미신으로 치부한다는 점이다. 차이점이라면 북녘 사람들은 풍수를 맹렬히 비난하면서도 무의식 중에 그에 대한 마음의 기울어짐을 어쩌지 못하더라는 것이다. 몇 년 전 북한에서 만난 어떤 사람은 풍수에 관한 나의 설명을 듣고 나더니 “그렇다면 그건 민속 지형학이 아니냐”는 의견까지 낼 정도였다.
그렇지만 풍수를 이야기하면서도 풍수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드물다. 말이 안 되는 이 얘기는 엄연한 사실이다. “풍수, 아 그거!”, 그러면서도 풍수에 대해 아는 것은 그저 좌청룡 우백호에 명당 운운하는 정도다. 그러면서 풍수가 뭐냐고 묻는다. 풍수 전공자인 나 자신도 아직 분명한 정의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 우리 풍토를 읽어내는 조상들의 지혜가 축적된 것이라 말하지만 이것은 정의가 아니다.
나는 처음 묏자리 잡기 식의 풍수로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다가 이것이 얼마나 큰 폐단을 사회에 던졌는지를 알게 되면서 의도적으로 그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했다. 풍수의 사회적 폐단은 조선 후기 실학자들에 의해 개진되었다. 우리나라는 풍수 때문에 망할 것이란 극언을 한 실학자도 있었다.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나는 풍수의 목적을 근심 걱정이 없는 명당(明堂), 길지(吉地)를 찾는 데 있다고 보았다. 결국 그런 곳은 심심산골이나 고전적 농촌에서 찾아야 한다는 사실에 직면하고는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도시에서도 명당을 찾아낼 수는 없을까. 그 이후 나는 이 문제에 모든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명당은 당신 마음 속에 있다’는 결론이었다. 하지만 어느 날 답사에서 풍수에 조예가 깊은 팔순 어르신의 한마디를 들으면서 다시 회의에 빠졌다. 그 어르신은 “결국 자본(資本)이 명당 아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돈이 명당이란 것이다.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명당같은 곳에서 살 수 있는 세상인데 구태여 이런 산골에서 무엇을 찾아 헤매느냐는 질책으로 들렸다. 돈으로 행복을 얻을 수는 없지만 명당같은 땅을 만들 수는 있다. 하지만 그곳은 ‘명당같은’이지 명당은 아니다. 동아일보 연재에서는 현장 답사와 연구를 통해 ‘돈이 명당인가’, ‘풍수를 어떻게 현대 도시생활에 적용할까’의 문제를 다뤄볼 생각이다.
▲최창조교수는 누구?
△서울대 지리학과 동 대학원 졸업 △국토개발연구원 주임연구원 △79년 이후 청주사대 전북대 서울대 교수 역임 △91년 현장 답사 위해 서울대 교수 사임 △현 경산대 역사지리학부 풍수지리학과 객원교수 △주요 저서:땅의 논리 인간의 논리, 한국의 자생 풍수, 땅의 눈물 땅의 희망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