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건강]'투병 문학상' 최우수상 소명철씨 투병기 원문

  • 입력 2001년 5월 27일 19시 51분


세월은 유수와 같다는 말이 실감날 정도로 나의 인생여정 또한 빠르게 지나온 것 같다. 홍안의 꿈 많고 혈기왕성하며 정의감에 불타던 청년장교가 군문(軍門)에 들어와 그동안 크고 작은 역사의 사건들과 세월의 흐름을 함께하면서 보낸 지 어느덧 24년째......

군대조직 특성상 장교신분이란 막중한 책임감으로 힘은 들었지만 젊고 강한 청년을 사회로 배출시킨다는 뿌듯한 자부심과 긍지를 갖게 하였다. 그러나, 불의와는 조금도 타협하지 않는 원칙주의 성격과 강한 상승욕구 때문에 전혀 예상치 못했던 질병(간경화 및 사구체신염)을 갖게 되었고, 앞만 보고 달려온 자신의 뒤안길에는 깊은 병마의 풍상과 함께 인고의 흔적을 간직한 채 오늘도 나 자신과 생사의 처절한 싸움을 하고있다.

내가 이 글을 기고한 것은 자신이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던 지병들이 완치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불치병으로 엄청난 정신적?육체적 고통속에 삶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고 실의에 빠져있는 나 같은 중환자들에게 조금이라도 삶에 대한 희망과 용기와 자신감을 심어주고, 아픔을 함께하고 싶은 순수한 마음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이해하여 주었으면 한다.

건강이라면 누구보다도 자신했던 나에게 불행의 그림자가 다가온 것은 지난 91년 1월경, 연초부터 부대시범과 검열 준비 등으로 무척 바쁘기 때문에 나는 몸을 아끼지 않고 주야없이 열심히 근무하였다.

평소 무슨 일이든지 한번 시작하면 마무리를 짓지 않고는 그만두지 않는 성격이라 계속된 업무와 긴장 등으로 피로가 쌓였지만 건강에 관심을 가질 수가 없었다. 더욱이, 초급장교 시절 훈련강도가 높은 공수부대에서 특수훈련으로 단련된 체력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이 정도의 과로로서는 전혀 문제가 없을 것으로 확신하였던 것이다.

그러던 중 새 구두를 신은 발뒤꿈치에 염증이 생겨 처음에는 항생제 복용과 외상치료만 하였으나 점차 염증부위가 심해져서 썩었기 때문에 마취시킨 후 수술하였다. 그 후 발의 염증이 없어질 때까지 많은 항생제를 복용하였다.

91년 5월, 평소 담배는 피우지 않고 술도 많이 먹지 않는데 속이 더부룩하며 신물이 넘어오는 등 소화도 안되고, 몸의 피로도 빨리 느끼기 시작하였다. 내 옆에서 몸의 변화를 걱정스럽게 지켜본 아내의 귄유로 군병원에 가서 혈액검사를 받았고, 검사결과는 B형 바이러스 간염이란 것을 알았다. 군의관은 간염 효소치가 56/54 이고, 초음파 검사결과, 간의 상태는 대체적으로 깨끗하다며 현재는 초기단계이니 조심하면서 정상적으로 근무하라고 했다.

간염이 발병했다는 사실에 처음에는 엄청난 불안를 느꼈지만, 잘먹고 쉬면 낫는다는 주변사람들의 위로와 나의 어설픈 상식으로 마음의 동요를 차츰 줄여나갔다. 간염의 실형선고를 받은 후 초기에 있었던 피로 외에는 별다른 징후도 없기 때문에 평소처럼 축구, 테니스, 구보, 행군 등을 하였고, 술도 가끔 마셨다.

그러나, 간염발병 6개월 후부터는 눈이 따갑고,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리고, 정신이 산만하여 집중이 안되고, 신경이 예민하여 사소한 일에도 짜증을 내는 등 심한 피로감으로 업무의욕과 능률이 급격히 감소되었다.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던 나는 아내와 함께 양산군에 있는 삼성의료원에서 종합검사를 하였고 내과 전문의로부터 만성활동성 간염이란 진단을 받았던 것이다.

내과의사의 부친이 직업군인 출신이라서 아주 친절하였다. 간염치료약은 현재까지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에 현대의학으로서는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것과 한번 감염되면 대부분 환자들은 점점 악화되어 간경화 내지는 간암으로 진전된다며 과로를 피하고, 단백질과 비타민 등의 충분한 영양섭취와 휴식, 주기적인 혈액 및 초음파 검사 등을 통해서 더 이상의 진행을 억제해야 한다고 하였다. 한가닥 희망이 있다면 미국에서 개발한 인터페론 주사를 맞는 방법이 있지만 인터페론 주사도 30%의 효과밖에는 없으니 모든 것은 본인이 판단해서 결정하라며 약도 지어주지 않았다.

의사로부터 만성활동성 간염의 일반적인 진행과정을 듣고 난 후 나의 병도 평생 고칠 수 없는 불치병이란 것을 알았으며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하였다. 처음에는 자신의 발병사실을 믿지 않으려고 하면서 혹시나 오진이기를 기대하였다.

‘전생에 내가 무슨 업보가 있다고 천형이라는 불치병을 많은 사람들 중에 나에게 주는 것인가, 신이 내린 선악의 심판이 공정한 것인가, 내가 지금까지 어떻게 달려왔는데 여기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저 않아야 한단 말인가’ 이렇게 스스로 자문하고 암담한 미래를 생각하니까 참으로 자신의 처지가 비참하였다. 엄청난 충격과 좌절감으로 삶의 의욕을 잃고 지내다가 나중에는 자신에게 가혹한 형벌을 내린 신을 원망 및 부정하였고, 건강에 무지했던 자신이 한없이 저주스럽고 미웠던 것이다.

사흘동안 잠을 자지 않았지만 정신은 말짱하였고 가슴과 머리는 터질 것 같은 통증으로 괴로워했었다. 상심한 나의 행동을 지켜본 아내와 두 딸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으며 나에 대한 실망도 컸으리라, 흔들리는 가장 때문에 우리집은 어둡고, 침울하고, 답답한 분위기로 변하였던 것이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가족들에게 부끄럽다. 아픔이 찾아왔을 때 오히려 초연하게 받아줄 수 있는 가장의 넉넉하고 여유있는 삶의 태도가 절실하게 필요한데 그렇게 하지 못한 자신이 안타까웠다.

그러나, 언제까지 방황과 좌절, 분노와 자학속에서 지낼 수는 없었다. 고통의 시간이 점차 지나면서 ‘물에 빠진 자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다시 살아야겠다는 강렬한 의지가 가슴 밑바닥에서 용솟음을 쳤다.

간염의 초기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간염효소치(GOP/GDP)는 200-350을 오르락 내리락 하자 걷기도 힘들 정도로 피곤하여 정상적으로 일을 할 수가 없었다. 나를 신뢰한 사단장의 각별한 배려로 군병원에 후송가지 않고 집에서 건강을 회복하도록 별도의 요양기간을 받았다.

병은 한 가지인데 고칠 수 있다는 약은 수 십가지가 넘었다. 병원에서 불치병이라며 고칠 수 없다는 간질환을, 시중의 특정 약국 및 한약방에서는 자신들이 조제한 약을 일정기간동안 먹으면 간염정도는 충분히 치유될 수 있다고 장담을 하였다. 그래서 그들이 조제해준 약을 수개월간 먹으면서 간질환에 효험이 있다는 붕어, 개소주, 미꾸라지, 잉어, 장어, 호박, 인진쑥, 굼벵이 등을 먹었지만 간 효소치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나는 친지의 권유로 ‘조상의 원을 풀어주는 굿을 하면 병을 고칠 수 있다’는 점장이 말을 믿고, 칠곡 가산산성에서 철야 산신재를 지냈지만 몸만 더 상하였던 것이다.

백약이 무효인 상태에서 조급하고 복잡한 마음을 다스리는데는 절만큼 좋은 곳이 없다고 생각한 나는 공기좋고 인적이 드문 산사에서 요양할 생각으로 송광사와 암자를 돌아다녔지만 비용이 많이 들어서 포기하였다.

’91년 10월, 부산에서 간질환 치료에 유명한 메리놀병원의 내과의사인 김박사를 찾아가 외래진료를 받았다. 요양기간이 충분하지 못한 절박한 상황이기때문에 나의 체면을 모두 버리고 순한 양처럼 김박사의 지시에 절대적으로 순응하였다.

간염이 초기상태이므로 병원 조제약 외 한약 등은 일체 먹지 말고, 육류의 고단백질과 비타민 등이 함유된 채소류를 많이 먹되 활동을 하지 말고 방안에서 누워 안정을 취하라고 하였다.

약을 먹은 지 3개월이 되자 간 효소치가 300에서 50으로 줄어 들었고, 김박사도 이 상태가 지속된다면 분명히 치료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라며 즐거워하였다. 나는 너무도 고마워서 완치만 된다면 평생 생명의 은인으로 생각하며 살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나의 기쁨과 믿음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병원에 다닌 지 5개월이 되자, 간 효소치는 150이상 다시 치솟기 시작하였다. 평소 68kg였던 체중이 78kg로 늘어나 활동하는데 불편하고 피로도 더 빨리 왔다. 김박사는 나의 간상태가 좋아지는 듯 하다가 다시 원래 상태로 돌아오자 만성 활동성간염이기 때문에 치료가 무척 어렵다며 처음부터 다시 한다는 생각으로 해보자고 했지만 나에게는 요양할 시간이 충분치 못했다.

따라서, 믿음에 대한 좌절감 때문에 지금까지 해왔던 병원치료를 중지하였다. 간염의 치료는 양약보다는 한약이 가장 효험있다는 주변의 권유에 따라 다시 밤열차를 타고 경희대 한의원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여러 가지 종합검사를 한 후 2개월 분의 한약을 조제해와서 달여 먹었는데 간 효소치는 300-350까지 상승하였다. 한의과 의사는 한약을 먹으면 일시적으로 간효소치가 상승할 수 있으니 당황하지 말고 꾸준히 먹으면 효과를 볼수 있다고 했지만 나는 더 이상 신뢰할 수가 없어서 지금까지 먹든 약을 모두 중지하였다.

그러던 중 건강가족동호회에서 발간한 ‘간질환을 고친 사람들’이란 책을 보고, 완치를 시켰다는 40대 여성과 직접 전화통화를 한 결과 자신도 만성활동성 간염환자로서 건강가족 동호회에 가입 후 식단표에 따라 식이요법을 했는 데 E항원도 소실되었고 지금은 여행도 다니며 정상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며 나에게 믿고 해보라고 권유하였다.

나는 건강가족 동호회의 박양호실장을 만났다. ‘간염은 점차적으로 간경화 및 간암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면역력을 증가시켜 항체를 생성시켜야 한다’는 박실장의 설명을 듣고 반신반의하면서도 정상적인 활동을 하면서 치료할 수 있다는 것과 현재 선택할 수 있는 다른 치료방법이 없기 때문에 녹즙과 건강보조식품, 한약제 달인물, 식단표에 의한 식이요법 등을 시작하였다.

건강가족동호회는 박실장의 통제하에 전국적으로 각 지회를 구성하고 있었고, 지회단위로 확보한 환자들을 관리하되 정기적인 검사결과와 환자상태를 고려하여 처방을 내려주었다. 건강보조식품은 식단표에 반드시 포함시켜 처방을 하였는데 영동식품에서 공급한 식품이 대부분이었고 가격도 상당히 비싼 편이여서 사 먹어야하는 환자로서는 경제적으로 상당한 부담을 느꼈을 것이다.

92년 4월, 6개월만에 병석에서 일어나 군복을 입고 출근을 하였다. 그동안 병마 때문에 고뇌를 많이 하였지만 ‘병마와 싸워서 반드시 극복하리라’라는 각오를 새롭게 다지며 끝없고 외로운 투병활동을 시작하였다.

나는 동호회에서 짜준 식단과 효모, 노루귀, 컴프리, 로얄제리 등의 보조식품, 복령, 구름버섯, 선학초, 어성초 등 한약제로 달인 물, 맥주잔정도의 녹즙 등을 하루 3회씩 매일 먹었다. 또한 생활하는 동안 간 효소치 변화에는 너무 민감하지 않도록 노력하였고, 스트레스나 과로는 가급적 피하되 몸에 피로를 느끼면 충분한 휴식을 취했다.

녹즙을 먹은 후부터 내가 활동하는데 이전보다는 제한사항이 많지만 부대로 정상적인 출근을 하자 우리가족들은 그동안 잃었던 생기를 다시 찾았고, 간에 특별히 좋다는 돌미나리, 민들레, 엉겅키, 씀바귀, 돗나물, 질경이, 인진쑥 등을 캐기 위해서 가까운 산과 들을 헤매고 다녔다.

그러나, 녹즙용 재료를 구할 수 없을 경우는 동호회나 시중에서 비싼 가격으로 사 먹어야 했다. 건강가족 동호회에서 요구하는 자연식 치료를 계속하려면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는 사람은 할 수가 없을 정도로 많은 비용이 들어간다. 나 역시 한달 평균 70만원 정도 지출되었으니 당시 월급으로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형편으로서는 상당한 부담이 되었다.

캐다놓은 나물은 아내가 다시 다듬고 씻은 후 종이로 감싸서 냉장고에 보관하였고, 매일 녹즙기에 갈아서 마시도록 준비하였다. 나는 일상생활을 통해서 녹즙, 보조식품, 한약제 달인 물 등을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먹었고, 짜장면?라면?빵?사탕?음료수 등 방부제, 화학원료가 가미되거나 인스턴트 식품, 양약은 금기식품으로 전혀 먹지를 않았다.

94년과 95년에는 두 번 정도 간 효소치가 정상으로 돌아 왔었고, E항원도 소실되어 자연치유를 기대하였으나 3-4개월이 지나자 다시 간 효소치 등이 상승하였고 E항원도 새로 생겼던 것이다.

그리고, 발병 2년 후부터는 비장비대, 혈소판과 적혈구 등이 감소되기 시작하였고, 혈액순환이 원활하지 못하여 손발이 차고, 등뼈주위의 뜨거운 느낌, 발과 다리의 마비 증상 등이 나타났고, 식후에 복부 좌우측의 통증, 소화불량, 만성변비, 사타구니 습진, 가려움 등의 새로운 증상이 발생하였다. 이처럼 변화가 심한 간질환때문에 투병생활 4-5년 후부터는 초음파 및 혈액종합검사결과와 자각증상만으로도 병의 진전상태를 스스로 판단할 수 있었다.

오랜 투병생활로 성격이 무척 예민해져 짜증을 자주부리는 나를 포근하게 감싸준 나의 아내는 성격이 다소곳하고 차분하며 현모양처형인 여자다. 병든 남편 뒷바라지하는 탓으로 손에 물기가 마를 시간도 없을 정도로 힘들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병수발을 거들은 아내, 남들은 여가와 문화생활을 하는데 오직 남편 병 가료를 위해서 집안에서만 다람쥐 쳇바퀴 돌듯 생활하는 아내, 그런 동안 곱던 얼굴은 잔주름이 늘어나고 흰머리가 생겼으며, 가느다란 예쁜 손은 시골아낙네 손처럼 굵고 투박하게 변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렇게 피눈물나는 투병생활을 하는 동안 나는 중령으로 진급을 하였고, 다시 전방 지휘관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곳에서도 나는 남을 의식하지 않은 채 종전처럼 식이요법을 철저히 지켰고, 항상 긴장된 가운데 조심을 하면서 교육훈련, 부대관리, 운동 등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96년 어느 날부터 소변에 거품이 많이 나오고, 발목과 종아리가 부어 손으로 누르면 자국이 생기는 것을 느끼기 시작하였지만 간때문에 나타나는 증상이라고 생각하였고, 운동을 하고 나면 다리의 부기가 빠지는 경우가 있어서 일부러 테니스나 산행을 하였다.

그러나, 97년 3월, 소변검사결과에 단백뇨와 혈뇨가 발견되었으니 정밀검사를 하라는 군의관의 통보를 받았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업무관계로 차일피일 미루고 말았다. 그렇게 수개월이 지나자, 발목과 다리의 부기상태가 점점 심해지고, 나중에는 사타구니의 고환에 물이 차서 퉁퉁 붓기도 하였다.

그제서야 내 몸에 이상징후가 있음을 심각하게 생각하였고, 97년 7월에 춘천 성심병원에서 종합검사를 한 후 신장염이란 것을 알았다. 그러나, 간과 신장 모두 질환이 있기 때문에 담당의사들도 무척 신중하였고 간에 무리가 가지 않는 범위 내에서 약을 조제해 주었는데 나는 약을 먹지 않고 견디었다.

그러나, 강원도 지역에서 근무하다간 건강관리가 안되겠다고 생각한 나머지 모든 것을 포기하고 9월에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에 도착하자 원자력병원 신장내과에 가서 진료를 받았고, 합병증으로 심한 나의 상태를 보고 서울대 병원 신장내과에 외래로 소개해 주었다.

지금도 원자력병원 신장내과 전문의를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그때 그분이 정확한 진단과 조치를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나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였을까, 투석중일까 아니면 신장이식을 준비하고 있었을까, 섬찍한 생각이 든다.

그렇게 해서 나는 서울대병원 신장내과에서 진료를 받을 수 있었고, 의사는 발병 원인을 정확하게 모르고 있으니 신장조직 검사를 먼저하고 처방을 한다며 조직검사 일정부터 예약하라고 했다. 신장 조직검사를 하기 위해서는 4일정도 병원에 입원해야 하기 때문에 예약신청을 한 후 3개월 이상을 기다려야 했다. 그 동안 나는 예전처럼 녹즙과 한약제 다린물, 식이요법 등을 계속하였고 인근에 있는 불암산에 올라가기도 하였다.

11월에 들어서자 나는 당면한 업무를 종결시키기 위해서 휴식도 없이 주?야간 무리를 하다가 감기몸살이 걸렸고, 심한 한기와 관절통, 소화불량, 변비, 식욕감퇴, 다리와 고환의 부기, 하복부의 심한 통증 등으로 일어나지 못했다.

다음날 나는 출근을 못할 정도로 상태가 빨리 악화되어 수도통합병원 중환자실에 긴급 후송되었다. 통합병원 군의관들은 초음파, 내시경, 혈액 및 화학검사 등을 종합적으로 검사하였고, 복수와 식도정맥류를 동반한 간경화와 만성신장염 의증이란 진단을 내렸고 초조해하는 나에게 냉정하게 말했다. ‘간경화입니다. 앞으로 군대생활하기가 힘들테니까 전역도 생각해 두시고, 간경화는 치료가 불가능하니 현재상태를 더 이상 악화되지 않도록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방법이 최선입니다.’

나의 삶에서 가장 큰 위기가 온 것이다. 엄청난 충격으로 절망의 나락에 떨어지는 것 같았고, 나에게 더 이상의 희망은 보이지 않은 채 칠흙같은 어두움만이 사방을 감싸고 조금씩 다가오는 것 같았다. 눈을 감고 있으니 지나간 세월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르고, 내가 살아오면서 잘못한 행동들이 스치고 지나가고 후회막심한 생각이 들었다. 내 옆에서는 몸에 심한 경련을 일으키면서 비명을 지르는 환자, 구역질을 하면서 토해내는 환자, 의식불명의 환자를 옆에 두고 애태우는 가족들이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삶과 죽음의 긴박한 상황이 일어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인생무상함을 절실하게 느끼지는 순간이며, 삶의 지옥이란 이처럼 아파서 힘들고, 고통스러운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간질환 때문에 수시로 정기검진을 하였고, 식이요법도 철저하게 잘해 왔었으나 한번 망가진 간은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좀 상태가 좋았다 가는 다시 악화되는 진행과정을 반복하더니 결국 복수 및 식도정맥류를 수반한 간경화와 신장염의 합병증으로까지 악화되고 말았던 것이다.

중환자실에서 1주일동안 치료를 한 후 위험한 단계는 벗어났다고 생각을 했던지 일반병실로 옮겨 주었다.

그곳에서는 얼굴이 검고 앙상하게 마른 몸에 복수때문에 숨이 가쁘다며 호소하는 간경화인 이원사, 아랫배에 통증이 있어 초음파검사를 하다가 종양이 발견되었다며 간질환에 대해서는 너무도 모르는 김원사, 종아리 수술 중 수혈 때문에 졸지에 간염환자로 돌변한 해병대 헌병상사, 만성간염 때문에 1년동안 병상을 지키면서 결혼걱정을 하고있는 공수부대 김상사 등이 나와 같은 안타까운 사연들을 갖고 생활하고 있었다.

군의관 회진과 간호장교들의 혈액검사결과에 따라 그들의 얼굴표정은 수시로 변하였지만, 어느 정도 마음의 정리를 하였기 때문에 전역 후에 자신의 거처와 치료계획을 구상하는 여유도 갖고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정신적, 육체적 고통이 심하지만 모두가 아픔을 함께 하고 있기 때문에 위로가 되었다.

나는 혈소판과 알부민 감소, 식도정맥류, 부종과 복수, 담낭 염증이 우려되는 상황이지만 비관적인 생각보다는 긍정적인 생각을 하였고 병원생활에서도 차츰 익숙해져 평상심을 찾아가고 있었다.

12월 4일, 서울대 병원에서 신장조직검사를 위해 입원하라는 연락을 받고 일정한 행정절차를 거쳐 2인 병실에 입원하였다. 나와 같이 병실에 입원한 사람은 신부전증 환자로서 동생으로부터 신장을 기여받아 이식수술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인천에서 중소기업을 하고있는 사업가로서 97년 초에 백병원에서 신장이 이상있음을 발견하였지만 짜고 매운 음식을 가리지 않고 먹었는데 1년만에 신부전증으로까지 병이 악화되었다며 나에게 조심하라고 주의를 주었다.

같은 병실에 생활하는 동안 왜 그 사람이 신부전 상태로까지 급속하게 진전되었는가를 알게 되었다. 나는 먹지 말라는 음식은 철저히 가려서 먹었지만 그 사람은 김치가 없으면 음식을 먹지 못하였다. 신장의 발병시기는 두 사람이 비슷하였지만 식이요법을 하지 않은 사람은 1년 후에 신장이식을 하지 않으면 살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신장내과 의사와 환자들을 통해서 신장도 한번 망가지면 이미 30% 이상은 훼손된 상태이며 절대로 원상복구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고, 지금까지 염증정도로 가볍게 생각하다가 부종의 단계까지 온 자신의 무지함이 한심스러워 보였다. 그러나, 지금부터라도 더 이상 악화되지 않도록 철저히 관리해야 겠다는 생각을 하고 약간의 검사와 병력기록, 부작용 발생시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각서 등을 쓰고 조직검사를 하였다.

조직검사중에 다소 긴장이 되었고 수 차례에 걸쳐 재시도하는 담담의사를 보고 걱정은 되었지만 신장조직 검사결과 95%이상 부작용이 없었다는 담당의사의 확신에 찬 말을 믿고 안심하였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조직검사 후 지혈시키기 위해서 신장부분을 압박하였는데 통증이 너무 심하였다. 아파서 밤새도록 뜬 눈으로 보낸 나는 아침에 소변을 보는데 지혈이 되지않고 붉은 피가 나왔다.

처음에는 회진중인 김교수도 늦어도 4일 후면 지혈될 것이라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만 지혈이 되지 않자, 간질환 때문에 지혈제 사용을 망설였던 담담의사도 어쩔 수 없던지 지혈제를 먹도록 하였다. 지혈제를 먹은 후에는 소변에서 응고된 피 덩어리가 나오더니 급기야 요도관이 막혀 변의는 느끼는데 배뇨가 안되고, 방광이 터질 것만 같아 앉지도 일어서지도 못하고 비명을 지르며 고통을 호소하였다.

졸지에 요도관에 고무호스를 연결하고 비닐주머니를 옆구리에 매었다. 인턴이 대형주사기로 고무호스에 알코올을 주입한 후 다시 흡입하는 과정을 반복하였는데 그 통증이 무척 심하여 이마에 진땀이 나고 몸에 전율을 일으켰다.

인턴도 긴장과 피곤함 때문에 이마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 6시간동안 요도관

에 고무호수를 새로 교체하면서 방광 속에 응고된 혈액을 끄집어내었는데 흐물거리는 모양을 보니 소름이 끼쳤다.

방광으로부터 응고된 혈액을 제거했다고 생각한 김교수는 신장에서 출혈된 혈관을 떼우는 조영술을 하도록 하였고 나는 다시 육중한 기계에 나의 모든 것을 맡긴 채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오른다리 허벅지 일부를 부분 마취시킨후 동맥에 구멍을 뚫고 관을 넣어 신장의 출혈부분 3군데를 성공적으로 메꾸었다.

1주일 입원하면 퇴원하리라는 계획이 뜻밖의 부작용으로 간과 신장 모두가 더 악화되었다. 손과 발, 다리와 고환에는 부종이 더욱 심하였고, 아랫배는 임산부의 배처럼 복수가 차서 호흡이 힘들었고, 기타 혈압, 콜레스트롤, 간효소치, 혈소판 및 알부민, 적혈구 등 전반적으로 중증의 상태로 악화되고 있었다.

이렇게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는 동안 나의 몰골은 숨을 쉬고 있으니까 인간의 형상이지 피골이 상접한 형색을 보면 생명의 유지가 힘들 것이라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그렇기 때문에 병문안을 다녀간 상관, 동료, 부하들 모두가 내가 앞으로 군대생활은 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하였고, 병원장으로부터 지휘보고를 받은 학교장도 동정심때문인지 위로의 말을 하였던 것이다.

인간이란 병마앞에서는 자신의 권위나 자존심은 정말 보잘 것 없을 정도로 내팽개쳐지는 것을 느꼈다. 대범하고 의연한 태도를 갖겠다는 최초의 마음은 심한 육체적 고통앞에서 한갓 허세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생존을 위한 굴욕과 수모를 스스로 감수하게 되는 것임을 알았다. 자신에게 왜 이렇게 불행한 일이 겹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것이 운명이라면 피할 수는 없겠지만 너무도 고통스러운 생을 살아가는 자신이 싫어졌다.

김교수는 신장 조직검사 결과 B형간염 바이러스에 의한 사구체 신염이란 것과 녹즙, 한약제 등을 지나치게 남용하여 신장이 나빠졌다며 발병의 원인을 알려 주었다. 그리고,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의사, 환자 본인, 가족 모두가 절실한 각오와 의지를 갖고 노력해야 한다’며 용기와 희망을 주었다. 그러면서 앞으로 치료를 하는 동안 자신이 처방하는 약제 외에 녹즙, 건강보조식품, 한약제 등과 같은 검증되지 않는 것은 일체 먹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나는 그날부터 녹즙, 한약제 달인 물 등을 완전히 끊고 병원에서 조제해주는 약만을 복용하기 시작했다. 간에 무리가 없는 범위 내에서 라식스 및 알닥톤, 레가론, 인테반스펜슐, 메바코, 삐콤, 알부민 주사 등을 적절히 투여하였고, 인터페론은 간경화에 효과는 없지만 현재 간질환이 심하니까 회복하는데 도움은 줄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며 사용해보자며 매일 1대씩 퇴원할 때까지 맞았다.

입원한지 15일째부터 기운은 없지만 회복되는 느낌을 갖자, 병상에서 일어나 아내의 부축을 받으면서 조금씩 복도를 걸었다. 복수는 있지만 이전보다는 많이 빠진 상태라 규칙적인 운동을 매일 하였다. 나는 이렇게 다시 찾아온 위기를 결국 극복하고 서울대 병실을 퇴원하여 국군수도통합병원으로 다시 돌아왔다.

내가 병원에 다시 돌아오자, 입원하기 전까지 전혀 몰랐던 초기 간경화인 기무사 김소령, 백령도 근무 중에 배가 아파서 호소했더니 군의관이 위가 헐었다며 위장약을 2개월 동안 먹다가 너무 심하여 서울 세브란스병원에서 간종양과 간경화의 진단을 받고 후송 온 해병대 박상사 등 두 식구가 새로 들어와 있었다.

같은 병실의 환자 중 만성간염과 C형 간염환자를 제외하고 모두는 전역심의 대상으로 결정되었다. 통합병원에서는 내가 서울대병원에 입원 후 수시로 진행상황을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군대생활이 힘들 것으로 판단하고 전역심의를 종용하였다. 나는 몸이 아프기 때문에 진급은 포기할지라도 군대생활은 그만 둘 수는 없다며 일언지하에 그들의 제의를 거절하면서 퇴원 후 통원치료하면서 정상적인 군대생활을 하겠다고 하였다.

나는 서울대병원 신장내과에 1주단위로 외래를 다녔고 김교수가 조제한 약을 먹고 지시한 사항을 철저히 지켰다. 서울대 병원에 간과 신장 합병증으로 치료중인 환자가 300명이라며 이중에서 악화되어 세상을 떠난 사람도 있고 현재보다 안정된 효과를 본 환자도 있다며 평생동안 치료한다는 생각으로 꾸준히 하면 좋은 약이 개발될 수도 있지 않겠느냐며 희망섞인 말을 하였다. 그리고, 현재 복수와 부종이 심하니 완전 무염식을 하고 인터페론을 6개월간 맞도록 하자고 하였다. 그러나, 통합병원 군의관은 간경화환자에게 인터페론을 사용한다는 것은 임상적으로 적합하지 않다며 수긍하지 않았다.

통합병원으로 돌아와 있는 3개월 동안, 나는 매일 꾸준히 2-3차례정도 울타리를 따라 산책을 하였고, 음식은 아내가 의사, 영양사와 상담해서 식단 스크럼을 짜준 무염식에 의한 식이요법을 하였고, 매일 법당에서 조용히 명상을 하고 자신의 마음을 안정시켜 나갔다.

나는 다른 환자들이 부러울 정도로 회복속도가 빨라졌으나 내 옆에 있었던 해병대 박상사는 식도정맥류의 염증을 떼우고 난 후부터는 음식을 먹지 못하고 다시 상태가 악화되어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더 이상 생존할 희망이 없다는 군의관의 결정에 불만을 갖은 가족은 서울대병원으로 긴급 이송하였고 그곳에서 수술을 하였으나 간종양, 복수, 식도정맥 출혈 등 상태가 너무 악화되었기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다.

자신의 병을 조기에 발견하고 조치하였더라면 이렇게 허망하게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 아닌가, 의료시설과 기술이 열악한 백령도에서 오로지 군인으로서 책무를 충실히 수행하다가 오진으로 장년의 나이로 어린 자녀들과 아내를 두고 먼저 세상을 떠나지 않았는가, 참으로 애석하고 분통이 터졌다.

박상사는 원래 제주도가 고향이어서 가족과 함께 생활을 해왔었는데 보직관리를 위해 백령도에 근무하였고 금년에 진급이 되었지만 계급장을 달아보지도 못하고 죽었다며 슬퍼하는 가족의 모습을 보고 ‘집착’의 허망함을 느꼈다.

얼마 전까지 서로가 자신감을 갖자고 위로하였는데 이렇게 훌쩍 떠나 버렸으니 삶과 죽음의 차이는 자신의 존재에서 인식되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내 마음 같아서는 전역 후 모든 것을 버리고 공기와 물 좋은 산골에서 살고 싶었지만 어린 두 딸의 장래와 어려운 가정형편을 생각하면 시골에도 갈 수가 없으니 군대생활을 할 수 있을 때까지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98년 4월, 나는 다른 사람들의 만류와 우려를 뒤로 한 채 통합병원을 퇴원 후 학교에 복귀하였다. 집으로 돌아오니까 이웃주민들은 우리를 보고 ‘죽는다고 소문난 사람이 살아 돌아왔다’며 환영을 하면서도 동정 어린 염려를 하였다.

평상시, 내가 하는 업무 자체가 항상 긴장과 압박 속에서 스트레스와 직결되기 때문에 자칫 관리를 잘못하게되면 더욱 악화될 수가 있었지만 ‘누우면 죽고 걸으면 산다’는 생각으로 투병 활동을 다시 시작하였다.

중증의 간질환 환자가 아픈 몸을 극복하고 정상적인 생활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 것이라는 것은 10년간의 투병생활을 직접 체험을 하였기 때문에 잘 알고 있다. 그 사람들이 생각한대로 군대생활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욕심을 부리다 영영 떠나는 것은 아닌지 나도 걱정은 되었다.

그러나, 간암으로 진행된 사람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사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암을 이겨낸 많은 사람들이 증명해 주고 있다. 어떤 사람이 건강을 찾고 어떤 사람이 불행을 당하는지가 문제인데 반드시 건강을 찾겠다는 확신을 가진 사람들만이 가능하리라고 나는 믿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가 살아오는 동안 가장 어렵고 힘들었던 철공소 공원 생활을 항상 생각하면서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라는 정신력으로 병을 이겨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최선을 다해서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구 병이 악화되어 목숨을 잃게 된다면 그때는 운명이라는 생각을 하고 죽음을 받아드리자는 것이다. 인간은 어차피 한번은 죽게되는 것이 아닌가, 아무리 오래 살아도 죽는 순간은 더 살고 싶은 것이 인간의 욕심인 것을 알면 그렇게 허무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지천명의 나이까지 살아서 하늘의 뜻과 순리를 따르면서 남은 여생을 누릴 수 있을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일지도 모른다는 진지한 생각으로 남은 생을 살겠다는 각오이며, 죽을 때의 나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준비하는 자세로 살아가고 싶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너무 원통하고 분통터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병든 몸으로 군대생활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라는 것은 직접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환자를 이해한다고 하면서도 공식적인 회식 등의 모임에 의식적으로 피하다보면 주변의 따가운 시선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하루 3회씩 일정한 시간에 약을 먹었고, 일과 후에는 교내병원에서 인터페론 주사를 1회씩 맞았고, 균형된 영양식과 하루 3끼 식사 모두 아내가 요리해 준 것을 먹었고, 일과 후 교내야산을 1시간정도 산책하였다. 또한, 외식은 않지만 식사를 해야할 경우에는 염분이 있는 양념은 먹지 않고 밥과 채소류만 먹었고, 술좌석에서도 일체 술은 마시지 않고 건배를 할 경우는 입에만 가볍게 대고 먹지 않았다. 상관이 술을 강권할 경우에는 술을 입안에 넣은 후 손수건에 다시 뱉어내어 입안을 헹구기까지 하였다. 회식자리에서 맛있는 음식들을 안 먹고 술취한 사람들의 객기를 정신이 말짱한 상태에서 받아 넘겨야 하는 등 이 모든 것을 극복하는데는 엄청난 집념과 의지가 필요하였다.

내가 투병생활을 하는 동안 병이 악화된 원인은 감기가 악화되어 다른 합병증을 초래하였거나 비슷한 증상으로 위험한 상황까지 발생한 일이 여러 번 있었다. 퇴원 후에도 3차례정도 심한 홍역을 치른 경험이 있기 때문에 매년 10월이면 감기예방백신을 어김없이 맞는다.

특히, 간질환자는 면역력이 약하기 때문에 항상 몸을 청결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나의 일상생활에서 외출 후 손발씻기, 하루 3회 칫솔질하기, 매일 따뜻한 물 샤워하기, 황사가 심할 경우는 외출 안하기, 식후 30분 정도 오른쪽으로 누워서 휴식하기, 매년 독감백신주사 투여하기, 업무?운동?외출 등으로 몸이 피곤함을 느낄 때는 즉시 누워서 휴식 취하기,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기, 잠잘 때 다리높이 올리기, 매일 몸무게와 혈압 수시로 확인하기, 추운 장소나 습한 장소 피하기, 매일 산책과 명상하기, 삶의 보람갖기 등 나름대로 건강관리 주의요법을 정한 후 반드시 지켰던 것이다.

나는 서울대병원 간 및 신장내과 외래를 2주일 단위로 다녔고, 99년부터는 1개월로, 00년 5월부터 현재까지는 2개월 단위로 정기검진을 하고 약을 먹고 있다.

퇴원 후 복수와 부종이 심했던 1년 동안은 인터페론 주사와 이뇨제(라식스 및 알닥톤)를 1일 2회씩 투여하였고, 복수가 완전히 빠진 후에는 부종정도에 따라 이뇨제의 양을 약간씩 조정하였으며, 001년 4월부터는 이뇨제를 먹지 않았다. 기타 장복하는 약인 레가론은 1일 2회, 삐콤은 1일 3회, 메바코는 1일 1회, 인테반스펜슐은 1일 2-3회, 게브랄티는 1일 1회 등으로 꾸준하게 복용하고 있다.

또한, 약을 장복하기 때문에 변비가 심하고 소화가 안되는 경우가 많았다. 변비약(아락실)으로 해소하는 것보다는 평소 물을 많이 먹고 해조류 및 야채를 많이 섭취하였으나 부종이 심할 때는 수분섭취도 제한하기 때문에 어려움이 무척 많았었다. 지금은 발목 및 종아리에 부종이 없어 부담없이 물을 마시고 있다. 속이 쓰리면 의사와 상담해서 간에 부담이 없는 위장약을 처방해서 먹지만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위장약은 먹지 않고 음식을 천천히 꼭꼭 씹어 먹었다.

간과 신장병에는 특효약이 없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김교수와 상담을 해서 간과 신장에 무리를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국선도 수련을 함으로써 긴장된 근육을 풀어주고 스트레스도 해소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욕심을 버리고 평안한 마음으로 생활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심신이 피로하고 힘들 때는 혼자서 눈을 감고 화두를 생각하며 깊은 명상을 하였다.

오로지 안정적인 건강을 유지해야겠다는 일념으로 새로운 투병생활을 한지 4년째... 평소에 복수가 차서 보행시 호흡이 곤란하거나, 식욕부진, 소화불량, 복통 등의 증세로 일과 후에는 파김치가 되어 대부분이 누워서 지내는 경우가 많았었는데 지금은 활동하기가 편하고, 복수는 99년에 완전히 없어 졌다.

00년 10월부터는 알부민 수치가 3.2로 정상이 되자 발목과 다리의 부종이 거의 없는 상태로 변하였다. 발목과 다리가 부어서 신발을 오랫동안 신지를 못하고 사무실에서 다리를 올려놓고 업무를 본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찡한 느낌이 든다.

혈액순환이 안돼 나타나는 다리마비 증세나 등뼈중앙 좌우측 주변에 뜨거운 증상도 많이 줄어들었다. 명상수련 후부터는 불안, 초조 등의 증세도 안정되었으며, 전신운동을 해서 그런지 입맛이 당기고 소화도 잘되고 잠을 자다가 중간에 깨지 않고 숙면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체질적으로 알르레기 비염으로 여름에도 콧물이나 재채기 등 감기와 같은 증상이 있었는데 지금은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 등을 고려할 때 내 몸의 저항력이 강화되어 면역력이 전반적으로 향상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되었다.

물론 아직도 혈소판 감소, 비장비대와 식도정맥류가 있기 때문에 출혈이 되지 않도록 단단한 음식과 변비시 배설, 흥분, 스트레스, 과로 등을 주의하고 있다. 식도정맥류는 간질환이 회복된 후에도 상당기간이 경과된 후에 정상이 되므로 가장 조심스럽게 관리를 하고 있다.

앞으로도 내가 투병생활을 하는 동안은 지금까지 해오던 것을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꾸준히 실천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길만이 나의 지병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생명을 연장시킬 수 있는 방법이란 것을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의 투병생활 체험을 바탕으로 나와 같은 간 및 신장질환자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첫째, 어리석게도 의학적, 임상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민간요법이나 건강보조식품 등을 지나치게 믿고 남용하지 말고, 균형된 식생활을 기본으로 하는 식이요법을 꾸준히 하라는 것이다. 녹색이 짙은 푸른 야채의 성분은 비타민과 미네랄로써 중요한 영양소지만 과량섭취는 오히려 부작용을 초래하는 만큼 푸른 녹즙을 마실 경우에는 의사와 반드시 상담 후에 당근, 토마토 등 식품으로 인정된 푸른 채소류, 해조류, 과일류 중에서 하루 1잔 정도만 하되 간과 신장의 임상학적 증상을 고려해서 해가 없는 것을 선택해서 마시고, 스쿠알엔, 로얄제리 등 고가 보조식품보다는 자신의 증상에 따라 단백질, 에너지, 식염, 수분 등을 고려한 식단표를 짜서 몸에 필요한 영양소의 과부족이 없도록 한다. 그리고, 음식은 가능한 오랫동안 천천히 먹어 소화력을 도와주어야 하며 맛있다고 해서 절대 과식하지 말아야 하며, 소식을 하되 항상 즐겁고 맛있게 먹으면 보약제를 별도로 먹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둘째, 만성질환자는 병이 오래되면 의욕과 자신감이 상실되어 기분도 가라않고 장래에 대한 희망도 잃게되는데 환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적극적인 삶의 보람을 갖는 일이다.

우리 몸 안에서 간염 바이러스나 암과 싸우는 면역기능은 절대적으로 정신적인 영향을 받게 된다. 스트레스, 우울, 절망감, 불안, 초조, 근심, 공포, 미움 등은 면역기능을 떨어뜨리기 때문에 어떠한 질병도 이길 수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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