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프리즘]송호근/“못믿겠다 전문가집단”

  • 입력 2001년 4월 24일 18시 40분


첨단지식으로 무장한 전문가들이야말로 지식정보사회의 꽃이다. 사회과학자들은 지식정보사회에서 사회의 헤게모니가 자본가들로부터 정보과학지식의 생산과 유통을 관리하는 전문가들에게 이양된다는 데에 동의한다. 전문가들의 역할이 그 만큼 중요해진다는 뜻이다. 그런데 지식정보사회로의 신속한 전환을 국가정책의 최우선 목표로 추구해온 한국에서 전문가들이 범국민적 불신의 대상이 된 것은 어찌된 연유일까.

필자가 몸담고 있는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에서 2월 실시한 전국조사의 결과를 분석하면서 침통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던 점이 바로 이것이다.

▼개혁 잘못해 국민 신뢰도 추락▼

‘귀하는 다음의 전문가들을 얼마나 신뢰하는가’라는 질문에서, 한국사회에서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는 11개 전문가 집단 중 시민운동가 한의사 교수가 겨우 중간점수를 얻었고(100점 만점에 50점), 나머지 8개 집단은 모두 50점 이하였다(‘불신한다’는 뜻). 그 중 국회의원(입법), 변호사(사법), 관료(행정)가 ‘가장’ 불신 받는 그룹으로 나타났고(10∼20점), 대기업 임원, 기자, 의사, 약사가 바로 위 순위를 차지했다(30∼40점). 이것도 놀라운데, 지난 5년 동안 신뢰도의 변화는 더욱 충격적이다.

시민운동가만 약간 상승한 반면, 10개 전문가 집단의 신뢰도는 급격하게 추락한 것이다. 전문가의 시대에 국민의 신뢰를 받는 전문가는 없었다.

주목할 만한 점은 두 가지다. 첫째, 국가운영을 담당하는 입법 사법 행정 엘리트들에 대한 극도의 불신감은 국가 자체에 대한 총체적 불신으로 변할 우려가 있고, 둘째, 국가―공적 영역(교육 언론 의료)―시민활동의 순으로 불신감이 차츰 작아지는 것으로 미루어 국민은 이제 공적 기능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고 사적 공간에 웅크리고 있거나 그런 자신들을 위로하는 시민운동에나마 작은 희망을 걸고 있다는 것.

이른 바 열린 사회를 만드는 것이 개혁정치의 최대 목표라면, 한국의 개혁정치는 개혁을 주도하는 각계각층의 전문가들에 대해 국민의 마음의 빗장을 걸어 잠그게 만들었다.

사정이 이렇게까지 악화한 것은 아무래도 국제통화기금(IMF) 사태와 이후의 위기관리 탓으로 보인다. IMF 사태가 정치, 행정, 경제 엘리트들의 자만, 무지, 부정의 합작품이었음을 인정한다면 이것을 치유하는 과정에서 그들은 적어도 쇄신의 몸부림을 보여줬어야 했다. 국민이 어떤 획기적인 변신과 개혁을 기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위기사태를 진정시키고 일상생활이 크게 위협받지 않는 상태로의 회복 정도였을 것이다.

그런데 지난 3년 동안 국민은 얼마나 많은 희생과 혼란을 겪었는가? 그것이 회복의 대가라고 치더라도, 개혁정책이 발표될 때마다 국민은 조마조마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으며, 개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개혁 주체들의 미숙한 기획과 전문가그룹들의 이전투구를 다시 목격해야 했다.

교육개혁은 실패했으며, 의약분업은 후유증을 앓고 있다. 성장연대에 자부심이 드높았던 경제엘리트들은 재벌개혁의 칼날을 피해 숨을 죽이거나 안전지대로 피신 중이며, 벤처인들은 정부 지원금을 활용해 벼락부자의 묘수를 찾고 있다. 불신 점수로 3위를 차지한 법조인들은 사법개혁을 원천 봉쇄하는 데 성공했는데, 특히 변호사들은 조만간 특단의 조치를 강구하지 않으면 국민으로부터 외면당할 위기에 처할 가능성이 많다.

전문가집단에 대한 총체적 불신은 곧 사회지도층의 부재를 의미한다. 위기상황이 닥치면 국민은 자신과 가까운 근린집단 외에 의지할 곳을 찾지 못하게 된다. 지역주의와 연고주의가 더 기승을 부리는 것도 이런 탓일 게다. 공적 기능에 대한 불신이 사적 영역의 울타리를 높게 쌓도록 만들었기에, 사회는 더욱 닫혔고 개혁은 난항에 부닥쳤다.

▼책임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이런 상황에서 지식정보화가 무르익은들 국민에게 어떤 혜택이 돌아올 것인가.

우리는 작금의 개혁정치가 자주 흔들리는 것을 정권 탓으로 돌리는 데에 익숙했다. 더 나은 세상을 기약해야 할 개혁이 아무 것도 판단할 수 없는 혼돈상태 같은 인상을 자주 심어 주었기 때문이다. 그도 그렇지만, 국민은 각계 전문가들에게도 그 책임을 추궁하고 싶어한다. 정책실패의 와중에서도 우리는 아직 스스로 책임지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송호근(서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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