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공정위의 고무줄 과징금

  • 입력 2001년 2월 23일 19시 00분


공정거래위원회가 군납유류 입찰 담합 혐의로 5개 정유사에 1901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가 4개월여 만에 3분의 1 이상 대폭 깎아준 것은 봐주기라는 의혹을 피하기 어렵다.

공정위는 원심결을 내릴 때 군납유류 입찰에 참여하는 정유회사의 임원들이 사전에 만나 입찰 가격을 담합한 것은 죄질이 나쁜 하드코어 카르텔에 해당한다며 사상 최고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그러다가 4개월만에 과징금 부과기준을 바꾸어 690억원이나 깎아준 것은 법률이 허용한 재량권의 범위를 벗어났다고 볼 수밖에 없다.

과징금 부과는 위반행위의 내용 정도 기간 횟수, 위반행위로 인해 취득한 이익의 규모 등을 참작해 결정하도록 법률에 규정돼 있고 그 세부기준은 고시로 정해놓고 있다. 그러나 이번 결정은 공정위의 잣대가 상황에 따라 신축성이 자유자재한 고무줄이라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다. 사건 초기에 비난 여론이 비등할 때는 큰칼을 휘둘렀다가 잊혀질 만하니 슬그머니 솜방망이로 넘어가는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공정위는 검찰의 요구에 따라 5개 정유사의 입찰담당 임원 6명을 고발한 사정을 참작했다고 하지만 행정적 제재와 형사처벌은 엄연히 성격이 다른 것이다. 임원과 법인을 뒤늦게 고발하면서 과징금을 깎아준 논리로 원용한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최근 경기후퇴로 인한 정유사의 현실적인 부담능력을 감안했다고 하나 이것은 과징금 분납 등의 조치로 해결해야 할 문제다. 이번 감액조치에 대한 공정위의 해명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원심결이 무리한 결정이었다. 어느 쪽으로 보나 공정위가 행사하는 재량권이 너무 크다.

근본적으로 군납유류 담합비리는 국민 세금으로 조성된 1500억원 규모의 국방예산을 훔친 범죄이다. 죄질도 나빴다. 이들 업체는 순번을 돌아가며 낙찰업체와 들러리 업체로 역할 분담을 했다.

공정위의 조사가 기업의 건전한 경제활동에 지장을 줄 정도로 가혹해서는 안되지만 세금을 훔치고 소비자들에게 피해를 준 불공정 행위에 대해서는 엄정한 처리가 따라야 한다.

본보 보도를 통해 정유사들이 국내 소비자 가격에 대해서도 담합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이후 공정위는 이 부분에 대한 조사를 3월 말까지 마치고 그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라고 한다. 정유사에서 민수용 유류의 매출액 규모는 군납 유류의 수십배나 된다. 우리는 민수용 유류 담합의혹에 대한 공정위의 조사와 처리를 지켜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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