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IN&OUT]아직도 못고치는 드라마의 '벼락치기' 관행

입력 2001-01-05 16:03수정 2009-09-21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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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교 시절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시험 때문에 '벼락치기'라는 것을 해 본 경험이 있다. 원래 시험이라면 매일 예습 복습을 꾸준히 하면서 준비하는 것이라고 선생님들이 말하셨지만, 어디 그게 말처럼 쉽게 되는 일인가?

시험 시간표와 범위가 정해지면 며칠 앞두고 밤늦게까지 책을 파면서 공부를 하는 '벼락치기'는 어떤 면에서는 청소년기의 추억중 하나이다. 처음에는 그래도 시험 며칠 전부터 준비를 하지만 차츰 시험 전날에 책을 보는 '당일치기', 쉬는 시간에 하는 '초치기'로 발전한다. 일단 '급한 불부터 끄고 보자'는 발상에서 나온 것이지만, 의외로 '벼락치기'가 꾸준히 공부하던 '범생'보다 더 좋은 결과를 얻는 수도 많다.

하지만 '벼락치기'의 달콤함에 취해 정기적인 학습을 게을리 하다가는 나중에 제대로 된 성적을 얻기 힘들다는 것도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요즘 안방극장을 가만히 살펴 보면 '벼락치기'를 실천하는 드라마들이 꽤 있다. 얼마전 종영을 한 SBS의 인기 드라마 A는 작가의 상습적인 '원고 지각'으로 방송 내내 악명이 높았다. 코믹 터치의 발랄한 작품을 잘 쓰는 이 작가는 방송이 일주일도 채 안 남은 상황에서 다음 회 대본을 보내 제작진을 골탕먹였다.

통상 미니 시리즈는 아무리 급하게 제작을 한다고 해도 한 회분을 제작하는데 일주일 이상 소요되는 것이 정상이다. 일단 배우들이 대본을 받아서 그 안에서 자신이 할 연기와 대사를 연습 해야 한다. 그 사이에 연출부는 내용에 맞는 장소와 소품을 구하고 스케줄을 짠다. 이를 바탕으로 야외 촬영도 하고, 스튜디오 녹화를 한다. 그리고 촬영한 테이프를 편집하고, CF와 자막, 타이틀 등을 붙여 '완제품'을 만든다.

대본도 작가가 그냥 써서 보내는 것이 아니다. 먼저 작가의 초고가 나오고 이를 검토한 연출자가 작가와 상의해 수정본이 다시 나온다. 이를 바탕으로 연출자가 카메라 위치와 쇼트의 종류를 정해 콘티를 짠 후 최종본이 나오는 것이 정상이다.

그런데 이런 과정을 거치는 드라마의 대본을 불과 5∼6일 전에 준다면 그 드라마가 제대로 제작될리 만무하다. 문제의 A 드라마는 제작시간이 딸리자 연출자를 추가로 투입해 두 개의 제작진이 동시에 움직이는 편법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중에는 대본이 한 회분 다 오지도 못하고 팩스나 이메일로 부분 부분 나눠 오는 사태가 벌어졌다. 연기자들은 녹화장이나 촬영장에 나와 대본을 기다리다가 드라마 연출팀이 가져오는 조각 대본을 가지고 현장에서 대사를 암기했다. 그래도 신기한 것은 이 드라마는 시청률이 꽤 좋았다. 하지만 이런 '벼락치기'가 이른바 프로 중의 프로가 모였다는 방송사 드라마 제작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인지….

다른 방송사의 또 다른 드라마 B. 큰 스케일의 시대극인 이 작품도 대본 늦기는 매한가지이다. 다른 드라마에 비해 세트나 소품의 준비가 꽤 많은 시간이 소요됨에도 불구하고 대본은 늘 방송 날짜를 아슬아슬하게 맞출 수 있는 최소한의 여유를 두고 도착했다. 그것도 책으로 온전히 제본된 것도 아니라, 컴퓨터로 원고를 친 초고가 그대로 연기자들의 손에 들어갔다. 역할에 대한 심도 있는 분석이나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질 리가 없다. 부족한 시간은 결국 잇단 밤샘촬영으로 이어진다. 역시 연기자나 스태프들의 컨디션이 정상일 리가 없다.

"전에는 일일극의 대본이 늦었는데, 요즘은 어떻게 된 것이 주말극이나 미니 시리즈의 대본이 늦게 나온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연기자가 감정을 조율하고 내면 연기를 하느냐? 솔직히 그동안의 관록으로 버틴다. 어떤 때는 내가 맡은 인물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때도 있다." 연기경력 20년째인 한 연기자는 "'지각 대본'은 연기자에 대한 예우는 고사하고, 시청자에 대한 기만"이라고 호되게 비판한다.

두 드라마 외에도 대본이나 촬영이 늦어져 방송 시간을 겨우 맞추는 드라마 '벼락치기'는 최근 2∼3년간 비일비재하다. 방송 1시간을 앞두고 마치 영화 장면처럼 조연출이 테이프를 들고 주조정실로 달려갔다는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방송 당일 야외 촬영을 한 테이프를 오토바이 퀵서비스로 가져와 편집을 해서 겨우 시간을 맞추었다는 전설적인 '무용담'도 있다.

작가들이 게으름을 피우는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대본들이 늦는 것일까? 시간이 부족하다고 변명할 수도 있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과거에 비하면 요즘은 드라마를 만들 시간적 여유가 많다. 갑자기 편성하는 상황을 제외하고는 보통 6개월 정도 여유가 있다. 특별히 계절 장면을 찍거나 준비가 필요하면 1년 전부터 찍는 경우도 있다. 비록 연기자는 캐스팅하지 못했다고 해도 최소한 대본 준비는 할 수가 있다.

그런데 이렇게 시간 여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작품들이 미니시리즈를 방송하는데 '최소한의 여유'라는 4회분도 미리 찍지 못하고 방송에 들어간다. 자연 시리즈 중간부에 이르면 시간 부족으로 쩔쩔 매게 된다. 이쯤되면 코 앞에 닥쳐야 글이 써지고 연출의 흐름이 잡혀지는 습관성 늦장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물론 이런 지각 대본에는 연출자의 아집이나 독선도 적지않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 작가와 대본을 써오면 시시콜콜한 것까지 일일이 간섭을 해서 작가를 위축시킨다는 것이다. 많은 PD들이 작가의 대본을 현장에서 수정하거나 새로운 부분을 추가하는 경우가 많다. 또 그런 즉흥성이 연출자의 능력과 권한임을 은근히 강조하는 경우도 있다.

솔직히 작가와 미리 심도깊게 논의를 했으면 굳이 그렇게 바쁜 촬영 현장에서 손을 봐야할 경우가 필요없지 않은가? 한 중견 연기자는 "문제삼는 부분은 대부분 극의 핵심이 아닌 지엽적인 표현이 많다. 예를 들어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부산을 가는데 대전역에서 국수를 먹었느냐, 아니면 대구역에서 김밥을 먹었느냐의 차이이다. 사실 시청자들에게는 누가 기차를 타고 부산을 갔다는 점이 중요하지 나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시청자의 눈치를 보면서 드라마 방향과 결말을 정하는 우리 드라마의 악습도 '벼락치기'를 악순환 시킨다. 생각해 보자. 소설가가 독자가 원하는 결말을 위해 내용을 수정하는 경우가 있는지, 또 영화 감독이 관객이 원한다고 도중에 결말을 바꾸는지….아무리 슬프고 애절하다고 해도 <로미오와 줄리엣>이 해피앤딩이 되지는 않는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어느 드라마가 인기가 있다고 하면 꼭 결말을 두고 '시청자들이 어떻게 해달라고 원한다'든지, '주인공을 살려달라는 메일이 쏟아진다'든지 라는 기사가 등장한다. 이에 대해 연출자가 책임 프로듀서는 "시청자의 의견도 존중하겠다"라는 말을 한다. 그렇게 중간에 엿장수 마음대로 내용을 바꿀 계획이라면 아예 처음부터 시청자의 의견에 따라 드라마 줄거리를 이어나가는게 낮지 않을까? 그래도 명색이 '드라마(Drama)'인데 우리 방송은 이상한 부분에서 시청자와의 쌍방향성을 추구한다.

방송에서 시간은 곧 돈이다. 엑스트라의 출연료도 시간으로 따지고, 스태프나 장비의 대여료도 시간으로 따진다. 결국 늑장 대본과 벼락치기 제작은 방송사의 예산낭비, 시청료의 낭비로 쓰인다. 공기업의 방만한 경영이 문제가 되는데, 우리 드라마가 효율적으로 제작되려면 아직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김재범 <동아닷컴 기자> oldfie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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