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범 누명 지만철씨 사연]"탈북자라고 범법자로 몰다니"

  • 입력 2000년 11월 29일 18시 36분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유분수지, 이럴 수도 있나요?”

2년전 북한을 탈출, 중국과 미얀마를 거쳐 천신만고 끝에 한국땅을 밟은 지만철(池萬鐵·44)씨.

‘노력만 하면 떳떳하게 잘 살 수 있다’는 꿈을 안고 들어왔지만 지씨는 최근 경찰에서 당한 일을 생각할 때마다 왠지 불안해진다.

남쪽 생활의 자신감도 잃었다. 생계를 유지해야 하지만 일이 영 손에 잡히지 않아 과일장사를 그만둔 지도 한 달이 넘었다.

지난달 16일 오전 1시20분경 112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관이 서울 노원구 중계동 지씨의 임대아파트에 들이닥쳤다. 동행한 신고인 C씨가 지씨를 가리키며 “이 사람이 날 때린 사람”이라고 지목하자 경찰은 지씨를 그 자리에서 현행범으로 체포했다.

C씨에 따르면 그날 0시10분경 인근 하계동 한신코아 앞 사거리에서 신호 대기중 한 승용차 운전자가 차로를 양보해 주지 않았다며 마구 때렸는데 지씨가 바로 ‘그 사람’이라는 것. C씨는 뒤따라오던 운전자가 불러줘 받아썼다는 승용차 번호를 증거로 제시했다.

연행된 지씨는 처음엔 당황했지만 사건 시간대에 자신은 과일 배달중이었기 때문에 내심 안심했다. 지씨는 “15일 밤 11시반경 자택을 출발해 과일 배달을 부탁한 임모씨와 함께 하계동 J아파트 L씨 집에 배 한 상자를 배달하고 0시40분경 귀가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며칠 뒤 “J아파트에 갔을 때 경비원이 ‘차를 여기 세우면 안되는데…’라고 지적해 정차 위치를 옮긴 일이 있다”며 자신의 차량번호가 적힌 경비원 근무 일지까지 제시했다. 임씨의 진술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지씨의 차는 1t 포터트럭인데다 C씨가 제시한 번호와도 딴판이었다.

그러나 조사 경찰관은 “C씨가 당신이 틀림없다는데 무슨 소리냐”며 “피해가 전치 2주밖에 안되니 합의하라”고 종용했다. 경찰관은 “죄 없는 사람에게 합의하라는 법도 있느냐”고 항의하는 지씨에게 “어디서 큰소리냐. 여기는 서울이지 평양이 아니다. 계속 그러면 앞으로 시도 때도 없이 부르겠다”고 윽박지르기까지 했다.

경찰관은 C씨에게 피의자 옷차림도 기억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얼굴은 정확히 알아봤는지, 승용차와 포터트럭은 천양지차인데 왜 지씨를 지목하는지 등 기초적인 사실조차 추궁하지 않았다.

지씨는 황당했다. ‘법 앞에 평등한 곳이 한국이라고 배웠는데 증인도 있는 내가 이렇게 당할 수 있나.’

피해 정도가 심하지 않아 조사를 받고 일단 풀려났지만 앞으로 거액의 벌금을 물어야 할 것이라는 경찰관의 말에 한 달째 영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빨리 결백이 밝혀졌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한편 경찰은 수사를 끝냈다며 지씨를 폭행혐의로 검찰에 송치하려다 기자가 수사의 허점 등을 지적하자 신고인 C씨와 지씨, 임씨 등을 다시 불러 뒤늦게 밤샘 조사를 벌이는 등 허둥대는 모습이었다.

담당 경찰관 L씨는 “피해자가 지씨가 범인임이 확실하다고 해 지씨를 추궁하지 않을 수 없었다”며 “편파적으로 처리하려 했던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하종대기자>orionh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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