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여조 쏟아붓고도 개선안돼 ▼
시위의 직접적 계기는 농가부채다. 농협중앙회 자료에 따르면 7월말 현재 농가부채는 39조8000억원(정책자금 14조3000억원, 상호금융자금 25조5000억원)이라는 천문학적 규모다. 문제의 심각성은 단순히 부채규모가 크다는 게 아니라 농가부채가 이미 오래 전에 농민의 부채상환능력을 벗어났다는 점이다. 더욱이 정책자금의 상환 만기일이 도래하면서 농민의 부담이 가중되고 있다. 빚을 갚기 위해 고리의 빚을 내는 악순환이 되풀이되고 농가부채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면서 파산 야반도주 자살하는 농민이 속출하고 있다.
대통령선거 때마다 역대 정부는 농민들에게 ‘돌아오는 농어촌’ ‘복지농어촌’ 등 장밋빛 미래를 약속했다. 그러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농업과 농촌에 적지 않은 돈이 투자됐지만 농촌문제는 날로 심각해지고 농가부채 경감은 주기적으로 수립되는 농촌대책의 단골 메뉴가 됐다.
1993∼98년 농어촌 구조개선을 위해 42조원이 투입됐고 1995년 이후에는 농어촌 특별세 재원으로 매년 1조5000억원이 투자되고 있다. 이처럼 많은 돈이 투입됐지만 농촌문제가 개선되기는커녕 ‘농민대란’의 부메랑이 돼 돌아오는 이유가 무엇인가. 한마디로 역대정권의 누적된 농정실패 때문이다.
오늘날 농업과 농민을 부채의 늪에 빠뜨린 직접적인 원인은 90년대 이후의 농산물시장 전면개방과 그에 대응한 농업구조 개선정책이다. 80년대 말 이후 농정은 경쟁력 지상주의를 기본이념으로 해왔다.
즉 농산물시장의 전면개방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우리 농업의 살길은 국제경쟁력 있는 농업의 육성밖에 없다는 것이다. 정부는 생산성 향상과 국제경쟁력 강화를 위해 농업경영의 규모확대와 시설화, 그리고 정예인력의 육성을 지원했다. 정부 지원은 농산물시장 개방에 대한 농민 불만을 완화하기 위한 시혜적 성격(보조금과 저리 융자)을 띠면서 농민들은 자신의 경영능력이나 시장조건에 대한 충분한 검토 없이 정부 지원을 받아 무리하게 규모를 늘렸다. 그러나 무분별한 농산물수입, 규모확대로 인한 국내생산의 증대, 설상가상으로 국제통화기금(IMF) 경제위기로 인한 농자재값 폭등과 소비감소 등으로 농산물 가격이 폭락하고 경영수지가 악화돼 농민들은 원금은커녕 이자도 못 갚는 처지에 놓이게 됐다. 농산물 가격 보장이 없는 농업투자 확대의 필연적 귀결이다.
농가부채는 농정실패의 산물이란 점에서 정부가 책임지고 해결책을 마련해야 한다. 정부는 농가부채특별법을 시급히 제정해 농가부채의 상환유예 및 장기분할 상환, 금리인하, 연대보증 및 연체문제 해결 등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
그러나 농가부채특별법을 제정해 발등의 불을 끈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농업투자의 증대→농가부채의 증가→주기적 부채경감대책이라는 악순환의 고리를 근본적으로 단절해야 한다. 이에 앞서 농정실패에 대한 관료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 자신들은 책임지지 않으면서 정책실패의 부담을 국민에게 스스럼없이 전가하는 관료들의 도덕적 해이가 근절되지 않으면 농정실패는 거듭될 수밖에 없다. 다음으로 그 동안의 농정실패에 대한 깊은 반성에 입각해 농정이념 및 추진체제를 근본적으로 개혁하지 않으면 안된다.
▼농가부채 특단의 조치 취해야▼
농정당국은 수단과 목적이 전도된 경쟁력 지상주의에서 벗어나, 국민생활의 관점에서 농업과 농촌의 다원적 기능을 극대화하고 농업 담당자인 농민의 생활수준 및 복지증진을 추구해야 한다. 또 비민주적 농정체제(엘리트 농정, 중앙정부의 설계농정, 시혜농정)를 혁파하고 국민의 정부가 약속한 대로 ‘농업인을 위한, 농업인이 주인되는, 농업인과 함께 하는 농업정책’을 추진해야 한다. 농민의 주체성이 확립되지 않는 한 농가부채 경감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없다.
박진도(충남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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