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즈업]94년 시집 엮은 뒤 작고 유영택 할머니

  • 입력 2000년 11월 19일 18시 36분


“꽃 같은 그 마음에 마음 비단결 / 그 뉘라 그 마음씨 알기나 할까 / 떠날 때 스물네 살 금년 마흔넷 / 지금은 그 머리도 백발 보이리.”

이달 말 이산가족 2차방문단의 일원으로 서울을 찾는 이석균(李錫均·74)씨는 몇 년만 빨랐어도 어머니 유영택(柳榮澤)씨를 직접 만날 수 있었겠지만 이제는 어머니의 절절한 한이 담긴 시집만 남아 그를 맞게 됐다.

94년 당시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유할머니가 남긴 시집의 제목은 ‘내 울어 너 온다면’(평단문화사 펴냄).

“막둥이를 앞에 안고 사립 밖에 서서 봤다 / (…) / 아른아른 서울 가는 큰 자식을 바라볼 때 / 하 즐거워 싱글벙글 내일 일은 영 몰랐다 / (…) / 그날 그시 날 본 것이 마지막이 되고 만 것 / 나는 정말 몰랐었다.”

유할머니가 한을 토해내듯 가장 그리워 한 것은 50년 전남 순천에서 서울대 공대로 유학보낸 맏아들 석균씨. 그러나 석균씨뿐만이 아니다. 그를 포함해 5남3녀 가운데 셋이나 6·25전쟁을 계기로 헤어져야 했던 것.

유할머니는 이들을 그리워하며 일생 동안 대학노트 27권에 300여편의 시와 수필을 남겼고 이 가운데 100여편을 골라 시집 발간을 준비하다 숨진 것. 유할머니는 이 시들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설명을 남겼다.

“칠십객의 늙은 어미, 뭣 하자고 글 쓰는고 / (…) / 세상 사람 들어보오. 내가 여기 써놓은 글자 / 알고 보면 글이 아녀, 돌덩이나 쇠도 아녀 / 형용없는 원한뭉치 쌓였다가 터져나와 / 이 종이에 받았다오….”

유할머니의 시에는 분단의 상처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서울로 유학가 납북된 장남과 6·25전쟁때 간호사로 끌려가 가까스로 탈출했다 숨진 딸, 그리고 해방전 행정 사법고시에 합격했으나 남파돼 20년을 감옥에서 보낸 뒤 숨진 사위 등에 대한 그리움이 곳곳에 배어 있다.

유씨의 막내아들 이석오(李錫伍·52)씨는 “어머니는 행여나 형님의 소식이 올까, 집배원이 지나갈 때마다 동구밖으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곤 하셨는데…”라며 시집으로만 남은 어머니의 정을 떠올리다 끝내 눈물지었다.

<이헌진기자>mungchi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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