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성전/결코 지울수 없는 ‘인연’

  • 입력 2000년 11월 5일 19시 15분


바람이 없어도 낙엽은 내려 도량에 쌓인다. 마를 대로 마른 낙엽의 낙하는 소리가 없다. 집착을 가지기에도, 지난 여름날의 영화를 돌아보기에도 낙엽은 너무 가볍다. 육신의 무게만을 던 것이 아니라 상념의 무게까지도 모두 놓아 버린 낙엽의 모습이 서늘하게 가슴을 헤집고 들어온다. 그것은 일체를 버린 불교적 의미의 해탈이었다.

낙엽이 뉘 발길에 밟히기 전에 나가 도량을 쓸었다. 낙엽이 쓸릴 때마다 도량에는 빗살의 무늬가 물결처럼 남겨지고 그 위를 또 낙엽이 내려와 덮었다. 쓸어도 쓸어도 낙엽의 자취를 지울 수 없는 도량에 서서 나는 ‘인연’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았다.

어느 날 원효가 머물고 있는 곳으로 설총이 찾아 왔다. 자기를 버리고 간 아버지를 찾아간 설총의 응시에 원효는 빗자루를 던지며 마당을 쓸라고 했다. 바람 많은 가을 날, 설총은 마당을 쓸고 또 쓸었지만 낙엽은 내리고 또 내려 설총의 비질이 지나간 자리를 덮고 또 덮었다. 설총은 아버지인 원효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한없는 원망과 의문이 담겨 있었다. 그것은 자기를 버린 아버지인 원효의 비정에 대한 원망과 쓴 자리가 없는 자리에 남겨지는 비질에 대한 의문이었다. 설총의 긴 응시에 답하듯 원효는 마침내 닫았던 입을 열었다. 그것이 인연이라고, 인연은 지우려 해도 결코 지워지지 않는 것이라고.

얼마 전 나는 속가의 형님 내외와 함께 금강산에 다녀왔다. 출가를 하고 나서 십수년 만에 처음으로 나는 그들과 함께 여행을 한 것이다. 십수년의 세월은 그냥 흘러간 것이 아니라 그들의 머리에는 희끗희끗한 늙음을 남겼고, 내게는 사문(沙門)으로서의 세월의 깊이를 남겼다.

배가 장전항에 도착하던 날 새벽, 내 방문을 두드리며 나를 깨우는 형님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나는 아주 잠깐 동안 행복한 착각에 빠졌다. 그 순간 밀려오던 먼 과거로부터의 따뜻함. 언제나 홀로 일어나 잠을 털 듯 찬물에 얼굴을 씻던 새벽을 그 날은 나의 형님이 따뜻하게 열어준 것이다. 출가를 해 살아도 당신은 아직도 여전히 내가 당신의 배려가 필요한 동생이라는 사실을 애써 기억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누군가 누군가에게 관심을 지니고 염려해 준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가. 이 세상에서 가장 기쁜 것은 누군가의 마음을 받았을 때가 아닌가. 예기치 않은 순간에 받게 되는 고운 마음. 그것은 마치 계곡의 물과도 같이 또 다른 마음의 어둠과 고뇌를 씻어 준다. 서로 마음을 수수할 수만 있다면, 그리하여 서로의 순수와 진실을 확인할 수 있다면 그것은 얼마나 큰 즐거움일까. 우리들의 불행은 마음을 열지 못하는 것이고, 우리들의 슬픔은 마음의 순수를 잃어버린 데 있는 것은 아닐까?

마음은 만나는 마음을 따라 변한다. 따뜻한 마음이 내게 올 때 내 마음도 따뜻해지고, 차가운 마음이 내게 올 때 내 마음도 얼음과 같이 차게 변해 버린다.

3박4일의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던 날, 동해항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간의 쌓인 정이 있으면 다 씻어 내라는 듯, 비는 거세게 내렸다. 그러나 씻어야 할 것은 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내 마음의 비정함이었다. 출가 수행자라는 이름으로 많은 인연들에 대해 따뜻한 마음을 건네지 못했던 내 지난날들의 어둠을 씻어 내고만 싶었다.

우리는 지금 참으로 비정한 세월을 살고 있다. 옛날과 달리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정이 없다. 누구라도 만나면 반갑던 시절은 이제 지나가 버린 것이다. 수많은 인연을 만나지만 우리는 그냥 무심히 지나치고야 만다. 그것은 우리들의 삶이 그만큼 불행해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 만나 인연을 맺는다는 것은 소중한 일이다. 부모로서, 형제로서, 친구로서, 부부로서 인연을 맺는다는 것은 눈먼 거북이 바다에서 나무토막을 만나는 것과 같이 어려운 일이다. 그 소중하고 귀한 인연을 우리는 너무 등한히 하고 있지는 않은가.

지금 그대는 어떠한 인연 속에 있는가 돌아 보라. 행복은 그렇게 맺어진 인연을 소중하게 보듬고, 맺어질 인연에 대하여 진실을 내보일 때 싹트리라.

성전(옥천암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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