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보의 옛날신문읽기] 양공주, 유엔마담 그리고 화냥년

  • 입력 2000년 11월 3일 15시 15분


불경기랍니다. 퇴출이랍니다. 제2의 IMF 대란이 오는게 아닌가 해서 걱정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불경기의 여파로 서울 강남 등지의 술집들도 덩달아 파리를 날리고 있다는 소문입니다.

룸살롱의 마담들과 여종업원들은 단골들에게 DM도 보내고 전화도 걸어보지만 역부족이라지요. 그나마 이따금 들르는 손님들도 돈을 별로 안쓴대요. 팁도 쫀쫀하게 준다지요. 2차를 원하는 손님도 별로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요즘 여종업원들의 수입은 예전에 비할 바가 못된다는군요. 이래저래 불경기가 여러 사람 속상하게 하네요.

오늘 소개해 드릴 1969년초의 한 신문기사도 ‘불경기 때문에....'입니다. 어떤 신문인지는 알 수가 없군요. 날짜도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하여튼 제목은 ‘위안부 접객소 진출, 성병 번질 우려'입니다.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의 미군 상대 위안부들이 요즘 급격한 불경기로 시내 나이트클럽, 바, 카바레 등 접객 업소로 진출하고 있으나 서울시 보사당국은 이 현상을 오히려 자연 취업이라고 방관하고 있어 성병 만연이 우려되고 있다.

작년까지만도 4백여명의 위안부들이 들끓던 이곳은 금년 들어 1백50여명으로 줄어들었는데 이러한 현상은 차츰 미군들이 한국 실정에 익숙해져 사창가 출입을 잘하지 않고 최근 가족 동반이 늘었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요즘 이곳 위안부들은 1달라∼50센트에도 몸을 팔고 있으며, 빚에 얽매인 사람들을 제하곤 거의 모두가 시내 접객업소로 진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 보사당국은 “스스로 살길을 찾아 취업한 것이므로 단속할 생각이 없다”고 오히려 권장하고 있어 접객업소에 있어서의 성도덕 내지 풍기문제가 우려되고 있다. >

저는 기사문 중에서 ‘권장' ‘방관' 같은 표현들이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그리고 소시 적의 우울한 에피소드 한토막이 떠오르는군요.

70년대, 제가 중학교 2학년 때 얘깁니다. 얼굴이 아주 검었던 체육선생 한분이 애들을 운동장에 모아놓고 이런 훈시를 하셨습니다.

“차렷, 열중쉬엇! 미군에게 몸을 파는 우리 누나들은 애국자다. 그 누나들이 벌어들이는 달러는 우리나라 경제발전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그 누나들을 양공주, 유엔마담이라고 손가락질 하면 안된다.”

체육선생은 학교 도서관 등 건물을 손으로 가리키며 이런 얘기도 했지요.

“저 건물들을 짓는데도 누나들이 도움을 준 것이다. 잊지 말아라. 이놈들 움직이지마. 야, 늘보!”

아, 이런 얘기도 하셨습니다.

“일본도 전쟁에서 진 뒤 젊은 여자들이 미군에게 몸을 팔아 달러를 벌었다. 오늘날 일본이 경제대국으로 성장한데는 그런 누나들의 공이 컸다. 차렷, 열중쉬엇!”

무슨 연유로 체육선생께서 그런 얘기를 하셨는지는 기억에 없군요. 그날 교무실에서 다른 교사와 함께 그 문제를 토론하다 나오셨나?

나른한 봄햇살이 슬펐습니다. 어디선가 실려오는 꽃향기가 슬펐습니다. 우리는 운동장을 열 바퀴 돌고, 바람 빠진 공으로 축구를 했지요.

세월이 흐르고, 저는 체육선생의 훈시가 이 사회에 넓고 넓게 퍼져있었음을 여러 번 확인할 수 있었지요. 예를 들면 박종성 교수같은 분은 ‘한국의 매춘'이라는 책에서 이런 분석을 하고 있습니다.

< 1970년대에 들어오게 되면 문제는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한다. 정부나 공공권력이 매춘을 방지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고 도리어 자극하고 권장하는 관망세력으로 돌아서는 것이다. 그 이유야 다 번듯한 논리들로 무장되어 있었지만 결국 내막은 왜곡된 외화 수입 극대화 전략의 일환이었을 뿐, 다른 것은 있을 수 없었다. >

다른 얘깁니다만, 화냥년은 환향녀(還鄕女)에서 온 말이지요. 1637년 병자호란의 와중에 청나라로 잡혀갔다 고향에 돌아온 누나들을 지칭하다 오늘날의 화냥년으로까지 발전했습니다. 그 숫자가 무려 50만명이었대요. 누나와 여동생이 오랑캐한테 잡혀가는 것을 막아내지도 못한 못난 사내들이 기껏 한다는 말이 화냥년이었던 겁니다.

옛날 신문을 보니 남자 공무원과 남자 기자들도 ‘성병우려' ‘자연취업' ‘방관' ‘권장' ‘풍기문란 우려' 따위의 의견이나 내놓고 있군요.

늘보(문화평론가)letitb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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