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 Digital]서울지법 즉결심판 풍경

  • 입력 2000년 10월 26일 18시 39분


희끗한 머리에 초라한 점퍼차림. 순서를 기다리며 넋을 놓고 바닥만 내려다보던 한 중년여성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피고인석으로 튕겨 나왔다.

이 여인의 ‘혐의’는 구청의 허가 없이 서울 용산구 이촌동 길거리에서 오뎅과 떡볶이 등을 팔았다는 것. 도로를 무단점유했기 때문에 ‘도로교통법’을 위반했고 무허가 영업을 했기 때문에 ‘식품위생법’에도 걸렸다.

그는 잘못했다고 판사에게 머리를 조아리면서도 “앞으로도 계속 장사를 할 생각이냐”는 판사의 질문에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아픈 남편과 어렵게 대학에 다니는 아들의 뒷바라지를 위한 단 하나의 생계수단인 손수레를 도저히 버릴 수 없다며 그는 흐느꼈다.

이 여성은 “어려운 처지는 이해되지만 법에 위배되지 않고도 돈 벌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판사의 충고와 함께 벌금 7만원을 선고받은 뒤 법정을 떠났다.

26일 오전 즉결심판이 진행된 서울지법 321호 법정. 20만원 이하의 벌금이나 과료(科料), 구류(拘留)에 처할 수 있는 경미한 범죄에 대해 판사가 즉석에서 판결을 내리는 곳이다. 서울지법 관내에는 지원 5곳을 포함해 모두 6곳의 즉결심판 법정이 있으며 서울지법의 경우 매일 20∼25명이 즉결심판을 받는다.

자신에게 불리한 진술은 거부할 수 있으며 즉결심판에 이의가 있을 경우 7일 안에 정식재판을 청구할 수 있다는 내용을 알리고 나면 바로 재판이 시작된다. 공소장도 필요없고 검사, 변호사도 없다. 인적사항을 확인한 뒤 쟁점이 없는 사안의 경우 잘못을 시인하고 선고를 받으면 보통 3분 안에 재판이 끝난다.

“100원만 달라”며 구걸하다가 행인이 돈을 주지 않자 멱살을 잡고 행패를 부렸다는 이유로 피고인석에 선 박모씨(49·여)는 자신의 주민등록번호조차 외우지 못했다.

옆에 함께 선 맹인 남편의 손을 꼭 붙잡고 있던 박씨가 벌금으로 5만원을 준비해 왔다며 주머니에서 구깃구깃한 지폐 몇 장을 꺼내보이자 이를 한참 쳐다보던 판사는 벌금 4만5000원을 선고하고 부부를 돌려보냈다.

이처럼 고단한 삶을 꾸려나가다 어쩔 수 없이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에게 판사가 선고하는 형량은 대략 벌금 3만∼7만원. 구류형까지 선고하지는 않지만 당사자들에게는 ‘거액’인 벌금형을 내리는 것이 마음이 편치는 않다고 한 판사는 말한다.

그렇다고 생계형 범죄만 있는 것은 아니다. 중고자동차 판매상인 김모씨는 판매대금을 주지 않는 고객을 찾기 위해 경찰에 허위 도난신고를 냈다가 구류 3일을 선고받았고 도로공사 현장소장으로 일하는 이모씨(44)는 물이 새는 낡은 하수도관을 고치다가 공사가 늦게 끝나는 바람에 교통을 방해했다는 이유로 선고유예 판결을 받았다.

D대학 경제학과 2학년인 김모씨 등 2명은 인터넷을 통해 ‘백혈병 어린이 돕기’사이트를 본 뒤 무작정 모금함을 들고 지하철로 나섰다가 철도법 위반으로 걸렸다.

허가 없이 지하철 안에서 모금운동을 하는 것이 위법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이들은 20분동안 모금한 3800원의 15배에 가까운 6만원의 벌금을 내고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갔다.

대부분 판결에 승복하고 곧바로 법정을 떠나지만 증거도 없는데 당사자들이 엇갈린 주장을 내세울 경우 판사는 난감하다. 억울한 면이 있을 수도 있는 만큼 꼼꼼히 들어줘야 하지만 법정에서 서로 핏대를 올리며 같은 주장만 되풀이하게 내버려둘 수도 없기 때문.

얼마전 법정을 찾은 한 가족이 그랬다. 아내는 “가족을 부양할 능력도 없으면서 매일 술만 마시던 남편이 200만원을 주면 집을 나가겠다고 해 어렵게 돈을 마련해 주었으나 약속을 지키지 않고 폭력을 휘둘렀다”고 주장했고 남편은 “아내와 아들에게 얻어맞고 밟히기까지 했다”며 맞섰다. 이들은 법정에서 계속 목청을 높이다가 결국 모두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선고를 받은 사람들은 곧바로 1층 사무실로 내려가 벌금을 내는 등 ‘형집행’을 받는다. 321호 법정이 옆의 다른 법정과 칸막이로 분리돼 있는 이유도 이들을 마지막까지 통제하기 위한 것.

바로 같은 시간 칸막이 너머 바로 옆 형사법정에서 열리고 있는 수십명의 비리 정치인과 경제사범들의 재판과 대조적인 풍경이다.

수천만원의 돈을 받고서도 “대가성 없는 정치자금일뿐”이라고 주장하며 집행유예로 풀려나오는 형사법정 피고인들의 ‘배짱’과 ‘여유’는 즉결심판 대상자에게는 흉내조차 내볼 수 없는 딴세계 사람들의 일이기도 하다.

▼경범죄는…▼

즉결심판을 받는 사람들 대부분이 저지르는 ‘경범죄’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지난 5월부터 3개월간 서울지법 관내에서 즉결심판을 받은 1445명 중 경범죄처벌법위반으로 걸린 사람은 654명. 도박이나 폭행 등으로 형법에 걸리거나 예비군 훈련에 출석하지 않아 향토예비군설치법을 위반한 경우, 무면허 운전 등으로 도로교통법을 위반한 사람도 꽤 많지만 전체적으로는 경범죄처벌법을 어긴 경우가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

경범죄. 10만원 이하의 벌금이나 구류, 과료에 처할 수 있는 경미한 범죄를 말한다. 흔히 알려진 노상방뇨나 무임승차 외에도 현행법에는 모두 50개 유형의 경범죄가 존재한다.

이 중에는 ‘여러 사람이 모인 장소에서 뱀이나 끔찍한 벌레 등을 팔아 불쾌감을 주는 행위’ ‘근거없이 신기하고 용한 약방문을 내세워 사람들의 마음을 홀리게 하는 행위’ 등 과거 ‘길거리 약장수’에게나 적용되던 거의 사문화된 것들도 있다.

속이 들여다보이는 옷을 입어서는 안된다는 ‘과다노출’ 조항은 물론이고 공연장이 아닌 곳에서 대가를 받고 다른 사람들에게 춤을 가르쳐서는 안 된다는 ‘비밀 댄스교습’ 금지조항도 있다.

그나마 88년 개정 때 4개 항목을 없앤 뒤에도 남아있는 죄명들이다.

주위 사람들이 한 번 눈을 흘기고 마는 새치기나 술주정 등 사소한 행위들도 처벌 대상에 들어있다. 새치기나 술주정, 녹지지역에서 나무나 꽃을 꺾는 행위, 길거리에 함부로 침을 뱉거나 애완견의 대변을 수거하지 않는 것 등. 도로나 공원 등 공공장소에서 험악한 문신을 노출시켜 혐오감을 주는 것과 거친 언행으로 다른 사람을 귀찮게 하는 것, 못된 장난을 쳐 타인의 업무를 방해하는 것 등 기준이 모호한 경범죄도 있다.

<이정은기자>light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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