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홍호표/성인식으로의 초대?

  • 입력 2000년 10월 22일 18시 31분


나이가 조금만 들어도 ‘요즘 아이들’의 노래를 모르겠다는 사람이 많다. m.net와 KMTV 같은 케이블 음악채널은 물론 지상파TV 쇼프로 선택권도 청소년의 손으로 넘어간 지 오래다. 그렇다고 ‘가요무대’를 보자니 구세대로 몰리는 것 같아 자존심이 상한다.

그러나 기성세대가 ‘디지털 세대’에 콤플렉스를 느낄 이유가 없다. 요즘 가요란 알고 보면 기성세대가 젊었을 때 좋아하던 ‘그 시절 그 노래’에서 정서적으로 달라진 게 별로 없기 때문이다. 현란한 리듬과 춤, 요란한 조명과 복장이 약간 업그레이드됐을 뿐 내용은 옛날 그대로다.

냉전시대의 논리를 대입해 요즘 ‘극우상업파’ 노래들을 살펴보자. 박지윤의 ‘성인식’은 손가락을 바늘로 찔러 피가 나오는 뮤직비디오 장면으로 ‘성인식’이 무엇인지를 암시해 파문을 일으킨 곡이다.

‘그대여 뭘 망설이나요/그대 원하고 있죠/눈앞에 있는 날/알아요 그대 뭘 원하는지 뭘 기다리는지/나도 언제까지 그대가 생각하는 소녀가 아니에요/이제 나 여자로 태어났죠/…/나 이제 그대 입맞춤에 여자가 돼요/난 더 이상 소녀가 아니에요…’.

‘성인식’은 엄정화가 부른 ‘초대’의 신세대 판이다. ‘초대’는 ‘그대와 단둘이서 지샐 우리 밤을 난 기다려왔어/불을 켤 필요없어/아무말도 필요없어/그대의 모든 걸 내게 맡긴 채 그대 눈을 감고 있어/아슬아슬하게 아찔하게/이 마음과 이 눈빛과 이 손길로 오늘밤 그대를 유혹할래…하늘하늘하게 촉촉하게…’로 돼 있다.

이정현의 ‘줄래’도 같은 범주에 있다. ‘줄래’는 ‘나 오늘은 순결한 백합처럼 나 때로는 붉은 장미처럼/모든 걸 다 줄래 너에게 다 줄래…날 안아줘 너는 내꺼야…’의 가사를 지녔다.

‘성인식’과 ‘초대’는 작사작곡가 겸 가수 박진영의 작품이다. 박진영은 ‘키스 미’와 ‘Honey’에서 같은 정서를 스스로 숨가쁘게 드러낸 바 있다. 결국 이념 스펙트럼에서 박진영 박지윤 엄정화는 말초적 감각 마케팅으로 상업적 이데올로기의 ‘맨 오른쪽’에 자리한다. 이들은 일찍이 팝가수 마돈나가 짧은 반바지 차림에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콕콕 찌르며 온몸으로 갈파했던 유혹의 메시지를 입으로 쏟아내고 있다.

각각 70년대와 80년대 가수인 이장희와 정수라의 노래와 신세대의 노래를 비교해 보자.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오늘밤 늦게…터질 것 같은 이 내 사랑을…’(이장희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난 네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정수라의 ‘난 너에게’·영화 ‘공포의 외인구단’ 주제가). ‘박진영류’는 이들 노래의 정서적 연장선에 있다. 게다가 반세기 전 노래인 금사향의 ‘홍콩 아가씨’가 TV코미디에 등장한 뒤 요즘 10대 사이에 유행이다. ‘별들이 소곤대는 홍콩의 밤거리…꽃잎처럼 다정스런 그사람이면/그 가슴 품에 안겨 가고 싶어요…이 꽃을 사가세요…그리운 영난꽃/아아 당신께서 사 가시는 첫사랑이면…’.

별로 변하지 않은 대중가요의 정서와 닮은 게 또 있다. ‘그 시절’, 때만 되면 건물과 거리를 뒤덮던 ‘정치적 축하 메시지’의 현수막과 입간판이 요즘 도심에 현란하다. 한 대학 총장님도 현수막을 걸었다. 역시 정서는 진화하는 게 아니라 승계되는 것인가 보다.

<홍호표 문화부장>hp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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