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만의 종교이야기]현대사회의 영웅은 누구인가?

  • 입력 2000년 10월 19일 18시 47분


그리스 신화는 영웅이 지닌 종교적 구조가 잘 드러나 있기로 유명하다. 헤라클레스 아킬레스 오뒤세우스 같은 영웅들은 존재론적으로 신과 인간 사이에 놓여 있다. 신과는 달리 영웅은 죽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영웅은 여느 인간과는 다른 탄생과 죽음의 모습을 보이며, 초인간적인 능력을 발휘한다. 영웅은 예언과 치병 등의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인간을 재앙에서 구해내며, 문명적 삶을 창조한다. 살아있을 때보다 죽고 난 후에 영웅은 더 빛을 발한다.

◇스포츠스타 각광받는 세상

역설적이게도 영웅이 비로소 신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고, 불멸성을 얻게 되는 것은 바로 죽음을 통해서이다. 인간은 영웅이 자신들에게 베풀어준 고마움을 잊지 않음으로써 영웅에게 불멸성을 선사한다. 한편으로 영웅은 인간에게 잊혀지지 않는 존재가 됨으로써 불멸을 획득하며, 다른 한편으로 인간은 영웅을 통해 자신의 한계에서 벗어남을 꿈꿀 수 있다. 덧없이 스러질 운명의 인간에게 영웅은 초월의 신호처럼 비춰진다. 멀게 느껴지는 신에 비하면, 영웅은 인간에게 보다 친근하면서도 인간조건의 초월을 꿈꾸게 한다.

현대사회에서 영웅들은 누구인가? 누가 인간과 신 사이에 존재하는가? 인간처럼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지만 오랫동안 기억됨으로써 불멸성을 누리는 자가 누구인가? 아무래도 많은이들이 스포츠 스타를 꼽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인간이 희구하는 다중적 삶의 상징인 영화배우를 거론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이차원적 스크린 속의 영화배우보다 스포츠 스타의 활약은 훨씬 더 입체적이다.

◇천문학적 수입에 압도당해

스포츠 스타는 인간의 일상적 몸 동작이 지닌 한계를 벗어나고자 애쓰는 자이다. 그(녀)는 자기 근육의 파열을 무릅쓰고 보다 빨리, 보다 높이, 보다 강하고 많이 몸 동작을 하려고 한다. 그런 스포츠 스타를 봄으로써 사람들은 인간의 한계가 돌파되는 초월성을 감지한다. 아무리 인간 능력의 한계라고 고개를 저어도 여지없이 기록은 깨져버린다. 예컨대 손기정의 베를린 마라톤 기록과 지금 2시간 6분대의 기록을 비교하면 20분 넘는 기록단축이 이루어졌다. 기록돌파의 열망이 지금처럼 계속된다면 현재의 기록이 깨지는 것은 시간 문제일 듯 싶다. 스포츠 스타는 자기 몸이 다 망가지더라도 기록을 깨기 위해 몸부림친다. 그 대신 사람들은 그(녀)를 기억해 줌으로써 보상한다. 현대사회의 기억방법은 그들에게 일반인이 꿈꾸기 힘든 부와 영화를 누리게 하는 것이다. 스포츠 스타는 엄청난 돈에 파묻히고, 감당 못할 관심에 휩싸이게 된다.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어느 프로야구선수가 공 하나 던져 버는 수입이 보통 일반 월급쟁이의 한 달 봉급보다 많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일반인들은 감히 질투할 마음도 갖지 못한다.

◇영웅신화와 달리 체제순응

그러나 영웅으로서 스포츠 스타 세우기는 결정적으로 취약한 구석이 있다. 그리스 영웅과는 달리, 그들은 자신들을 영웅으로 만든 체제에 저항할 수 없다. 그들이 보내는 초월의 메시지는 열려있지 않고 닫혀있다. 스포츠 스타는 기록돌파의 선정성을 위해 자신의 근육을 희생시킨다. 일반인은 대중 스타들이 벌어들이는 천문학적인 수입에 압도당해 초라함을 느낄 정도이지만, 그들도 별반 다름없이 몸값에 저당잡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동류임을 확인한다. 그래서 오늘도 사람들은 신이 내린 운명에 저항한 그리스 영웅을 그리워 한다.

장석만(한국종교연구회 연구원·종교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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