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러 수교 10년]"접촉 늘었지만 마음의 벽 여전"

  • 입력 2000년 9월 27일 18시 57분


《우리나라가 ‘멀고도 두려운’ 대상이었던 러시아와 외교관계를 수립한 지 30일로 꼭 10년이 된다. 현재 한러 관계는 양국 대통령이 빈번하게 정상회담을 하고, 수많은 관광객이 양국의 주요도시를 잇는 항공망을 통해 상대국을 방문할 정도로 ‘가깝고 친근한’ 사이로 변했다. 그러나 현재 양국 관계가 수교 당시 우리를 들뜨게 했던 엄청난 기대 수준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비판도 만만치 않다. 양국의 인적교류 정치 외교 경제의 현장에서 활약하고 있는 주역들의 입을 통해 수교 10주년을 맞는 한―러 관계의 현재를 시리즈로 조망한다.》

러시아 외무부 산하 외교아카데미의 한국어 강사인 나타샤 안(48·여)은 수교협상의 임무를 띠고 제3국을 통해서 숨어 들어온 한국의 밀사(密使)부터 거대한 러시아 시장을 잡아보겠다는 야심을 품은 기업인에 이르기까지 그동안 서울과 모스크바를 오간 수많은 한국인을 만난 한―러 관계의 증인이다. 오늘날의 한―러 관계를 이룬 역사적인 현장도 여러번 지켜봤다.

▼수교초기엔 흥분과 기대▼

안씨는 ‘88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87년 모스크바를 방문한 한국올림픽위원회(KOC) 관계자들의 통역과 안내를 맡은 것을 계기로 90년대 초부터 밀물같이 몰려든 ‘한국손님’들과 만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만난 한국인이 줄잡아 1000여명.

안씨는 수교 초기 양국 인사들이 만나는 자리는 언제나 진지하고 분위기가 좋았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40여년 동안 적대하며 모르고 지내던 양측 인사들이 만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흥분했던 것. 한국인들은 평생 찾지 못할 땅으로 여겼던 모스크바에 왔다며 감격했고 러시아인들의 ‘미지의 나라’ 한국에 대한 기대와 호기심이 대단했다.

그러나 흥분과 환상이 가시면서 93∼94년부터는 분위기가 냉정해지기 시작했다. 안씨는 “이 같은 변화는 피차 서로의 수준차를 확인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인들은 기업인 정치인 일반시민 할 것 없이 무언가 얻어가기를 원했지만 시장경제를 잘 모르는 러시아인들은 이러한 거래를 이해하지 못해 제대로 협력이 이뤄지기 힘들었죠.”

▼문화적 이질감 극복못해▼

‘고려인’으로 불리는 재러 한인동포들과의 관계도 마찬가지. 모스크바를 찾은 한국인들은 처음에는 성의를 다해 친지를 찾았다. 그러나 수십년 동안 헤어졌던 친척을 다시 만난 기쁨은 시간이 지나면서 ‘부담’으로 변했다. 물보다 진하다는 피도 경제력의 격차와 문화적 이질감을 극복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안씨는 접촉이 크게 늘었지만 여전히 한국인과 러시아인이 서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한국을 처음 방문하는 러시아인들은 한국의 높은 생활수준에 충격을 받고 동경하게 됩니다. 그러나 한국인들이 얼마나 열심히 일하고 바쁘게 사는지는 잘 몰라요.”

러시아 국민이면서 한국인이기도 한 안씨가 보는 한국과 한국인은 어떨까.

“칭찬은 그만두고 듣기 싫은(?) 얘기만 할게요. 러시아에 와 있는 한국인들이 러시아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러시아인과 깊이 사귀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한국사람끼리 어울리고 밥도 한국식당에서 먹지요. 왜 여기에 사는지 모르겠어요. 한국인들은 만나면 고향이나 학교 같은 ‘조그만 공통점’부터 찾는데 그것이 외국인과 깊게 사귀지 못하는 원인인 것 같아요.”

▼폭넓은 인맥구축 중요▼

러시아에서는 소련시절부터 “다큐멘트(서류)와 스뱌지(관계)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말이 있을 만큼 개인적 친분관계가 중요하다. 안씨는 “러시아인들은 무뚝뚝해 보이지만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도 쉽게 마음을 연다”며 “러시아와 일을 하려면 먼저 인맥구축부터 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안씨는 러시아의 지하자원과 인구(시장)에만 관심을 갖지 말고 문화를 주목하라는 말도 했다. 문화적 자부심이 강한 러시아인들은 자기네 문화나 예술의 가치를 이해하는 외국인을 만나면 감동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인호(李仁浩) 전 주러대사나 권오기(權五琦) 전 부총리 같은 분들이 러시아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를 보여줘 러시아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는데 갈수록 이런 분들을 만나기 어려워 안타깝습니다.”

<모스크바〓김기현특파원>kimki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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