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주석의 옛그림읽기]정선의 '만폭동도'

  • 입력 2000년 9월 19일 18시 51분


걸작 ‘만폭동도’를 바라보노라면 영락없이 귓전을 울려오는 소리가 있다. 바로 판소리 ‘수중가(水宮歌)’ 중의 중중모리 ‘고고천변’인데, 자라가 뭍에 올라 난생 처음 명산 구경을 하는 대목이다. “예― 구부러진 늙은 장송 광풍(狂風)을 못 이겨 우줄우줄 춤을 출 제, 원산(遠山)은 암암(暗暗) 근산(近山)은 중중(重重) 기암은 층층 매산(每山)이 울어 천리, 시내는 청산으로 돌고 이 골 물이 쭈루룩 저 골 물이 콸콸, 열의 열두 골 물이 한데 합수(合水)쳐 천방저 지방저 월특저 방울저 방울이 버큼저, 건너 병풍석(屛風石)에다 마주 꽝꽝 때려 산이 울렁거려 떠나간다….”

그렇다! ‘만폭동도’는 음악이다. 넓은 계곡을 휩쓰는 골바람이 온 산을 한 무리 악사(樂士)로 여겨 한결같은 장단으로 흔들어대면, 탄력 넘치는 붓질로 신명나게 뽑아 올린 노송 줄기는 굵었다 가늘었다 흥겨운 가락을 타며 자연의 춤사위를 보인다. 그러자 콸콸 쏟아져 내리는 여울물이 이리 돌고 저리 곤두박질치다가 깊은 소(沼)에 이르러 제멋에 겨워 빙빙 도니, 그림 속에는 도무지 움직이지 않는 것이 없다. 신령한 산 기운이 연달아 찍어 내린 바위 결 사이 뽀얗게 피어오르는 물안개로 살아 숨쉬기 때문이다.

화제 글씨도 날아갈 듯하다. ‘천 개의 바윗돌 다투어 빼어나고, 만 줄기 계곡 물 뒤질세라 내닫는데, 초목이 그 위를 덮고 우거지니 구름이 일고 아지랑이 자욱하네(千巖競秀 萬壑爭流 艸木蒙籠上 若雲興霞蔚)’. 이 말은 본래 중국의 명산을 읊었던 고개지(顧愷之)의 절창이나, 이곳에 더 걸맞다. 그것은 작품이 사선(斜線) 위주 구성으로 속도감에 넘쳐나기 때문이다. 오른편 아래 앞 뒷산의 가파른 윤곽선이 너럭바위 주변 비스듬한 송림(松林)으로 여러 번 반복되며 메아리치고, 대소 향로봉은 이와 어긋나게 왼쪽 위로 불끈 솟구쳐 올랐다.

그리고 교차하는 이 두 흐름이 칼날같은 좌선암(坐禪岩)에 함께 반영되었으니, 아래로 흐르는 듯하다가 직각으로 꺾여 멈춰 섰다.

하지만 화폭이 온통 대각선 운동으로 들썩거리면 역동적이기는 해도 안정감을 잃기 쉽다. 그래서 정선은 유람객 뒤에 오인봉(五人峰)을 화폭 중앙에 똑바로 세웠고, 너럭바위를 에둘러 물과 아지랑이로 적당한 여백을 주었다. 특히 왼쪽 아래 구석에 유난히 짙고 강인한 붓질로 금강대(金剛臺)를 우뚝 심어 의지를 삼았으며, 위로는 아득하게 중향성(衆香城)을 줄지어 세워 유원한 공간감을 확보했다. ‘봉래풍악 원화동천(蓬萊楓嶽 元化洞天)’, 너럭바위에 새겨진 천고 명필 양사언(楊士彦·1517∼1584)의 글씨다. 아무렴, 이곳은 인간 세상이 아니니, ‘신선 사는 금강산, 조물주의 별천지’다.

오주석(중앙대 겸임교수)josoh@unite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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