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가 흐르는 한자]下馬評(하마평)

  • 입력 2000년 8월 6일 18시 46분


乘―탈 승 闕―대궐 궐 壤―토양 양 佩―찰 패 廟―사당 묘 碑―비석 비

乘馬(승마)가 말을 타는 것이라면 下馬는 말에서 내리는 것이다. 옛날 주요 교통수단이 말이었으니 지금 말로 하면 下車가 맞겠다. 말이건 자동차건 타고 내리는 것이야 필요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겠지만 굳이 下馬라는 말이 나름대로의 의미를 띄고 있는 까닭은 문화적인 배경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서울의 청와대는 경비가 삼엄하여 일반 인들은 감히 그 주변에조차 얼씬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옛날에도 그랬다. 당시의 청와대라 할 수 있는 宮闕(궁궐)은 권위와 복종의 상징이었다. 왕이 거처하는 곳으로 감히 함부로 행동할 수 없는 곳이었다. 왕과 신하, 또는 왕과 백성의 관계가 이렇게 벌어지게 된 것은 秦始皇(진시황) 때문이다. 천하를 차지하고 나자 자신의 존재를 ‘하늘’처럼 만들고 만 것이다. 사실 그 전까지만 해도 대등하지는 않았을지라도 그렇게 엄격하지는 않았다.

그러던 것이 진시황에 와서 엄한 법령을 만들어 군신간의 관계는 그야말로 天壤之差(천양지차)가 되고 말았다. 이때부터 궁궐은 聖域(성역)이 되어 출입이 엄격하게 제한된 것은 물론 설사 들어갔다고 해도 온갖 행동제약이 뒤따랐다. 궁중에서는 무기를 佩用(패용)할 수 없었음은 물론 말도 달리지 못하도록 했다. 그야말로 전제군주시대가 열린 셈이었다.

그런데 천자의 위엄은 궁문 밖에까지 뻗쳐 宮闕 주위의 일정한 지역은 禁域(금역)이라 하여 역시 엄격한 제한을 가했다. 그 뿐인가. 禁域은 宮闕 외에도 또 있었다. 宗廟(종묘)나 孔子의 祠堂(사당), 심지어는 將軍이나 高官의 출생지 및 무덤이 있는 곳이 그것이다. 존경을 표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곳에는 어김없이 碑(비)가 세워져 있으며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대소 관리를 막론하고 이곳을 지나는 者는 모두 말에서 내릴 것’(大小官吏過此者皆下馬).

그래서 이런 곳을 출입할 때는 누구나 下馬해야 했다. 소위 下馬碑인 것이다. 따라서 下馬碑 주위에는 늘 많은 사람이 들끓었다. 자연히 인물에 대한 評도 나돌기 마련이다. 장차 관직에 임명될 후보자에 대한 수근거림도 있었다. 下馬評인 것이다.

중국의 경우, 明나라 憲宗 때부터 실시했다고 하며 우리는 조선시대에 성행했다. 조선 太宗 때 처음으로 나무로 만들어 宗廟와 闕門 앞에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鄭錫元(한양대 안산캠퍼스 교수·중국문화)

478sw@mail.hany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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