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추적]'방송정화계획' 장관 한마디로 정화될까

  • 입력 2000년 8월 3일 19시 16분


박지원(朴智元)문화관광부 장관이 2일 방송의 선정성과 폭력성에 대해 강력히 경고 메시지를 보낸 데 이어 방송위원회와 TV 3사 사장들이 자정 결의를 하면서 방송계의 움직임이 분주해졌다. TV 3사는 3일 선정성 폭력성 프로의 폐지나 개편을 검토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그러나 일선 PD들은“정부의 ‘느닷없는’ 조치는 마치 독재 정권시절의 ‘장발 단속’이나 다름없는 조치”라며 “선정성과 폭력성을 부추기는 시청률 경쟁 등 구조적 원인을 치유하지 않으면 일과성에 그칠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PD 연합회는 3일 성명서를 내고 “장관이 ‘직을 건다’는 등 엄포성 발언을 할게 아니라 방송 문제 해결에 대한 제도적 뒷받침을 마련하는데 힘쓰는 게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SBS가 가장 민감하다. 송도균(宋道均)사장은 이날 ‘특별 사장 지휘서신’을 PD들에게 보내 “방송협회 회장단이 긴급 간담회에서 결정한 선정적 폭력적인 상황 묘사 지양 등을 충실히 반영하라”며 최근 물의를 빚은 프로 ‘TV 대발견’을 전면 재검토하라고 지시했다.

MBC도 여러 가지 자정 방안을 모색중이다. 특히 가슴 노출로 물의를 빚은 ‘일요일 일요일밤에’의 ‘써머크래프트’ 코너는 신설 2주만에 전격 폐지했다.

KBS는 제작국장들이 과잉 노출이나 연출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키면서 “찜찜하면 잘라라”고 지시했다. 또 방송위의 경고를 세 번 이상 받으면 해당 프로를 폐지하는 ‘삼진아웃제’를 활성화하기로 했으며 시청률을 겨냥한 선정적인 내용을 자제하고 청소년 프로그램을 더 개발해 가을 개편때 반영할 예정이다. 이에따라 조기종영 또는 폐지되는 프로가 잇따르게 될 것으로 보인다. 방송가에서는 특히 박장관이 간담회 석상에서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드라마가 있다”고 언성을 높인 점에 주목, 장관의 심기를 거슬린 ‘문제의 드라마’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29일 첫방영된 SBS의 ‘TV대발견’ 은 폭력성, 선정성을 ‘고루’ 갖췄다.

여성들이 가슴을 크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 실리콘이나 패드를 넣는 장면을 여과없이 보여줬고 “가슴이 한쪽으로 쏠렸다” “가슴에 달린 유두가…” 등의 발언이 방영됐다.

MBC는 ‘방송 사고’를 방불케했다. 최근 한자릿수의 시청률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일요일 일요일밤에’는 아슬아슬한 비키니 차림의 여성 출연자가 다이빙하다가 비키니가 말려올라가면서 한쪽 가슴이 그대로 드러나는 어처구니 없는 일까지 발생한 것.

이밖에도 방송 3사의 오락프로그램은 앞다투어 여성 연예인들의 수영복 입은 ‘몸매’를 보여주기 위해 수영장이나 바닷가를 배경으로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있으며 카메라도 정면에서 몸매를 훑어 올라가는 등 노골적으로 ‘성 상품화’와 ‘벗기기 경쟁’에 열을 올려왔다.

심지어 옴부즈맨 프로그램도 ‘선정성’이라는 지적을 받을 정도다. MBC ‘TV속의 TV’는 지난주 “TV가 너무 상업적으로 치우치면서 노출장면이 지나치게 많고 선정적으로 흐르고 있다”고 지적했으나 문제의 노출 장면만 모아 다시 한번 더 노출해 MBC홈페이지에 시청자들의 항의가 올라왔다.

TV의 선정성과 폭력성을 추방하자는 취지에는 누구나 공감한다. 그러나 장관의 한마디로 문제가 하루 아침에 해결될 것으로 보는 이는 거의 없다. 박지원장관은 1998년말 대통령공보수석 당시에도 “방송이 과소비를 부추긴다”며 방송을 호되게 질책했었다. 이에 따라 TV 3사 편성책임자들의 자정 결의가 잇따랐으나 일과성에 그쳤다. 또 방송광고공사가 최근 시청률을 광고 요금에 연동시키는 시청률 연동제를 시행함으로써 PD들은 시청률 경쟁에 내몰리고 있는 상황이어서 무조건적인 자제 촉구가 얼마나 현실성이 있을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제작 현장에서는 규제 기준에 대해 서로 생각이 다르다.

“공영과 민영 방송을 한가지 잣대로 잴 수 있느냐” “모든 방송사에 ‘허준’ 같은 프로그램만을 강요할 수는 없으며 강요해서도 안된다” “직을 걸 사람은 문화관광부장관이 아니라 방송사 사장들”이라는 등 여러 갈래의 반응이 나오고 있다.

방송법상 방송위원회가 문제의 프로에 대해 주의 경고, 시청자에 대한 사과명령을 비롯해 프로그램의 정정 또는 중지 명령이나 편성책임자(관계자)에 대한 중징계도 내릴 수 있다.

김정기(金政起)방송위원장은 좀더 강력한 제재수단을 고려중이다. 그는 “법정 기구인 방송평가위원회를 구성해 방송사의 공익 실현을 평가한 뒤 민방 등의 재허가시 반영하도록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정부가 방송광고공사를 통해 광고주에 ‘협조’를 요청하는 것은 사실상 압력에 가까운 것이어서 논란의 소지가 크다. 다만 시민단체가 나서서 불매운동이나 광고주에 편지보내기 등은 해외에서도 빈번한 사례다. 한국방송광고공사는 3일 “공익성이 높은 프로에 대해 우선판매를, 선정성 폭력성 프로는 판매에서 제한을 두는 등으로 차별화하겠다”고 밝혔다.

<허엽·강수진기자>h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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