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책]'우리 역사의 여왕들' '역사스페셜'

  • 입력 2000년 7월 17일 18시 39분


신라의 선덕(27대·재위기간 632∼647년) 진덕(28대·647∼654) 진성여왕(51대·887∼897). 우리 역사상 단 세 명뿐인 여왕이다. 어째서 신라시대에만 여왕이 출현할 수 있었을까?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최초의 여왕이었던 진덕여왕은 진평왕의 맏딸. 진평왕은 아들이 없었고 그래서 맏딸에게 왕위를 물려줬다. 아들이 없었다해도 어떻게 여왕이 탄생할 수 있었을까.

역사 속 여왕에 관한 궁금증을 파헤친 책이 최근 출간됐다. 조범환 서강대박물관 연구원이 낸 ‘우리 역사의 여왕들’(책세상)과 KBS 역사스페셜팀이 펴낸 ‘역사스페셜’(효형출판) 중 일부.

▽왜 신라에만 여왕이?〓각종 사료와 유물을 종합해 볼 때, 신라 여성의 지위는 남성 못지 않았다. 토지와 재산을 가졌고 상속도 가능했다. 또한 여성도 한 대에 한해 부계(父系)의 성원이 될 수 있었다. 이것이 여왕 출현의 배경이다. 이에 힘입어 신라에선 사위나 외손자도 왕에 오를 수 있었다.

▽남편과 자식 관계는?〓선덕여왕의 남편은 삼촌인 음갈문왕었다. 즉 아버지 진평왕의 동생과 결혼 한 것이다. 선덕여왕은 그러나 자식을 낳지 못했고 이에 따라 그가 죽자 사촌 여동생이 진덕여왕이 됐다. 선덕여왕이 즉위했을 때는 그의 나이가 이미 50세를 넘었다. 진덕여왕의 남편과 자식에 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진성여왕의 경우, 삼촌인 위홍이 남편으로 알려져왔다. 조연구원은 그러나 정부(情夫)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말한다.

선덕여왕 진성여왕 모두 다 근친혼을 했다. 하지만 이를 두고 음란하거나 방탕하고 보아선 곤란하다. 당시 신라는 근친혼이 행해졌고 특히 왕실에서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조연구원은 특히 “진성여왕이 음탕한 사람으로 알려져 왔으나 그것은 훗날 유교적 사관에 의해 지나치게 폄하된 것”이라고 말한다.

▽남자 귀족들의 불만은 없었을까?〓물론 있었다. 선덕여왕 말년인 647년엔 상대등(지금의 국무총리) 비담이 “여자 임금은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면서 난을 일으켰다. 그러나 진덕여왕은 김유신 김춘추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다. 진성여왕대엔 여왕에 대한 귀족들의 불만이 적지 않았다. 조연구원은 그러나 여자왕에 대한 것이라기 보다는 신라 하대의 총체적인 정치 불안에서 기인한 것으로 설명한다.

▽후대 사람들은 신라 여왕을 어떻게 보았을까?〓‘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47대 헌안왕은 “여왕은 암탉이 새벽을 알리는 것과 비슷하므로 본받을 일이 못된다”고 말했다. 고려 김부식 역시 ‘신라는 여자를 세워 왕위에 있게 했으니…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삼국사기’에 적었다.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여서 ‘동국통감’은 이들 여왕을 폄하해 왕이 아니라 여주(女主)라고 불렀다.

이에 대해 조연구원은 “대부분 유교적 명분론에서 비롯된 편견이며 따라서 여성 폄하 시각이나 오늘날의 문화적 관습으로 신라 여왕을 보아선 안된다”고 강조한다.

<이광표기자>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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