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미국의 해리포터 신드롬

  • 입력 2000년 7월 6일 19시 38분


8일 0시 1분이면 영국 미국 호주 등 영어권 국가의 서점들에선 380만권의 ‘해리 포터’ 제 4권, ‘불의 잔’이 열광하는 아이들의 손에 쥐어진다. 출판 역사상 최대의 초판 부수이자 서점 역사상 초유의 밤 0시 판매다.

그 뿐인가. 8일 아침부터 줄잡아 9000대의 페더럴 익스프레스(Fedex) 트럭이 인터넷서점 아마존을 통해 미리 주문된 25만권의 책을 미국 전역으로 실어나르기 위해 달린다. 대형뮤지컬과 할리우드 스타들의 얼굴을 비추던 뉴욕 브로드웨이 타임스퀘어의 대형광고판은 화려하게 ‘해리 포터’ 4권의 탄생을 알릴 예정이다. 스코틀랜드의 가난한 이혼녀가 단칸방의 추위를 피해 카페에서 쓰기 시작한 이 소설은 이제 비틀스 이후 영국이 생산한 최대의 문화상품이 되었다.

멀리갈 것 없이 동네서점에서도 ‘해리 포터’의 열기는 감지된다. 매서추세츠주 케임브지에 있는 하버드대 앞의 조그만 서점 워즈워드는 ‘불의 잔’ 초판을 300권 주문했다. 서점 창립 이후 100여년만에 처음있는 일이다. 베스트셀러작가 스티븐 킹의 경우도 50권이 상한선이었다. 점원은 7일 밤 9시에 정상적으로 문을 닫았다가 자정에 다시 열어 1시간 동안만 판매를 하겠다고 했다.

도대체 이 소설 속의 무엇이 이토록 아이들을 사로잡은 것일까. 성인들조차 500쪽이 넘어가는 소설은 마뜩찮아 하는데, 이번 제4권 ‘불의 술잔’은 자그마치 752쪽 분량이다. ‘해리 포터’ 포스터를 제 방 벽에 붙여놓고 1, 2, 3권을 계속 다시 읽으며 다음 책을 기다리고 있는 초등학생 딸아이는 분량을 말해주자 “두꺼울수록 더 좋다”고 반가워한다. “너무 재미있는 책은 아껴 읽느라 힘드는데, 분량이 많으니 얼마나 좋아요?”

‘해리 포터’가 미국 어린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엄청나다. 닌텐도와 포케몬에 탐닉할 뿐, 책이라곤 들여다보지 않던 옆집의 초등학교 2년생 헨리는 ‘해리 포터’ 덕분에 처음으로 그림없는 책, 100쪽이 넘는 책을 읽어냈다. 딸아이의 반 친구 제니퍼는 친구들로부터 소외되지 않으려고 읽기 시작했다가 급기야 세권을 모두 세 번씩 읽었고 4권을 사기 위해 7일 저녁부터 서점 앞에서 부모와 함께 줄을 설 거라고 의기양양해 한다.

책읽기는 아이들 사이에 새로운 지적 유희를 만들어냈다. 소설 속 이름에서 작가가 숨겨놓은 법칙을 찾는 것이 한 예. 우스꽝스런 인물은 D, 다소 비열한 인물은 S, 용감한 인물은 H, 기분나쁜 인물은 F로 시작되는 이름을 갖고 있으며 프랑스식 이름을 가진 사람들은 ‘깐깐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초등학생들이 운동장에서 키디치 게임을 하는 것도 곧잘 목격된다. 소설 속에서 키디치 게임은 빗자루를 타고 공중을 날아다니며 어딘가 숨겨져 있는 볼을 찾아내는 게임인데, 맨땅에서 그런 게임을 하자니 재미가 적다고 불평을 하면서도 계속하는 것에서 ‘해리 포터’의 힘을 확인할 수 있다.

아이들만이 독자는 아니다. 최근 전미대학서점연합의 집계에서도 ‘해리 포터’는 당당히 1위였다. 이 소설의 폭발적 인기는 도서관의 환상소설 분야 대출을 급증시키고 초능력에 관한 관심까지 고양시켜서 일부의 우려도 자아냈다. 미국 남부의 보수적 종교단체들은 ‘해리 포터 독서 금지’ 주장을 펴기도 했다.

‘해리 포터’가 가진 독창적 매력은 무엇일까? 우선 강력한 현실감이 꼽힌다. 대부분의 팬터지 소설들은 ‘옛날 옛날에’로 시작된다. 그에 비해, 이 소설의 배경은 현대의 런던이며 옆집의 평범한 아이가 혹시 마법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게 만드는 생동감 있는 형상화에 성공하고 있다. 1권에서만 60여명의 각기 다른 개성적인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해리를 학대하는 삼촌 내외가 나름의 사연을 갖고 있다든지, 냉혈한 같은 스내퍼가 해리를 돕는다든지 하는 식으로 인물들이 평면적이지 않고 살아 있다. 주인공 해리만 해도 마법의 능력이 없다면 보통 아이다. 그 아이가 영웅이 되는 과정은 마법학교에서의 모험을 통해 현실에서의 좌절을 넘어 인격적으로 성장해가는 과정과 함께 진행된다.

대부분의 어린이용 책이 단순한 구성인데 비해 ‘해리 포터’는 구성이 복잡한 것도 특징이다. 추리, 팬터지, 공포가 뒤섞여 있고 스포츠와 퍼즐까지 가미돼 흥미 유발요소가 총동원됐다고 할만하다. 인터넷에 해리 포터에게 보내는 편지를 쓴 어린 독자 루시앙은 “다른 책들은 이야기가 한두 가닥으로 이어지는데 이 책은 한가닥의 이야기가 다섯가닥 열가닥으로 펼쳐졌다가 다시 한가닥으로 모이곤 해요”라고 말한다.

종이책의 시대는 갔다고 걱정하거나 아니면 반대로 전자책의 도래를 점치며 의기양양한 사람들에게, 혹은 요즘 아이들은 책은 읽지 않고 컴퓨터 앞에만 앉아 있다고 우려하는 사람들에게 최근의 ‘해리 포터 현상’은 놀라운 사건이다. ‘해리 포터’ 시리즈의 진정한 의의는 문학과 출판에 대해, 그리고 어린이들이 무슨 책을 읽고 싶어하는가에 대해 기존의 이해가 얼마나 피상적이었던가를 폭로한 데 있지 않을까.

<보스턴=이영준 하버드대 대학원 동아시아문화학과 박사과정·전 민음사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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