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곳에선/멕시코]손봉숙/大選승리자는 국민

  • 입력 2000년 7월 5일 18시 35분


멕시코 국민은 2일 새로운 신화를 창조해냈다. 박빙으로 예견됐던 선거예측을 비웃기라도 하듯 야당인 국민행동당(PAN)의 비센테 폭스 케사다 대통령후보가 압승을 거두었다.

대통령 당선자 폭스조차 자신의 승리를 예측하지 못했었다. 선거 이틀 전 국제참관인단 앞에서 한 연설에서 폭스는 자신이 여론조사에서는 이기고 있지만 집권당인 제도혁명당(PRI)의 선거 투개표 부정 때문에 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토로했었다.

그러나 폭스는 42.7%라는 높은 지지로 당선됐다. 71년간 권좌를 지켰던 여당의 후보 프란시스코 라바스티다 오초아는 35.8%를 얻는데 그쳤다. 변화와 민주화를 갈망하는 멕시코 국민의 힘이 PRI의 71년에 걸친 불패 신화를 여지없이 깨뜨리고 말았다. 소련공산당의 집권기록 72년은 여전히 세계기록으로 남게 되었다.

선거예측기관들이 유일하게 맞춘 것이 있다면 제3당인 민주혁명당(PRD) 후보 쿠아우테모 카르데나스의 지지도 16%였다. 88년 대선에서 사실상의 승자였지만 승리를 도둑맞은 카르데나스는 이번 3수에도 실패함으로써 그의 대선 행보는 종막을 고할 것 같다. 폭스의 연합 제의를 끝까지 뿌리치고 정권교체를 열망했던 국민의 가슴을 조마조마하게 했던 중도좌파의 영웅. PRI에서 뛰쳐나와 민주혁명당을 창당해 정치 민주화를 이룩하는 데 누구보다 큰 기여를 했던 그였지만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 할 판이다.

멕시코 국민이 바란 것은 진정한 변화였다. 그들은 70여년 동안의 일당 집권이 가져온 부패, 치안 마비, 경제실정을 투표로 심판했다. 20세기 최초의 사회혁명을 일으킨 멕시코는 이제 21세기 벽두에 투표를 통한 평화혁명으로 세계를 또 한번 놀라게 한 것이다.

폭스는 국민이 바라는 바를 잘 읽었다. ‘변화를 위한 동맹’이라는 선거연합을 결성해 ‘변화’라는 말이 가진 신화적인 힘을 선점했고 이를 맘껏 이용했다.

PRI가 재집권하면 미래가 없다는 그의 호소에 97년 카르데나스를 압도적으로 지지했던 멕시코시티의 시민들도, 그리고 국민행동당에 비판적이었던 지식인들도 그에게로 돌아섰다.

기업인 출신의 폭스는 뛰어난 언변과 사교술, 그리고 카리스마로 비교적 단기간에 전국적인 정치인으로 부상했다. 주지사를 지낸 그는 국민행동당에서 쉽게 대통령후보 자리를 거머쥘 수 있었고, 이제 PRI의 장기집권을 끝내는 정치영웅으로 기록되게 됐다.

그에게 남겨진 과제는 장기집권이 남긴 인적, 제도적 유산을 척결하고 멕시코 사회가 안고 있는 온갖 난제를 슬기롭게 해결하는 일일 것이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지만 국민은 하원의석의 과반수를 폭스의 선거연합에 안겨다 주었다. 이는 결코 작은 선물이 아니다. 거대 여당과 2개의 작은 정당으로 이뤄진 과거 정당체제는 이제 서로 견제와 균형을 적절히 유지하면서 정국을 원만하게 유지할 수 있는 정당체제로 재편될 전망이다.

PRI가 기록한 최초의 패배를 어깨에 걸머진 라바스티다 후보는 결과에 깨끗이 승복했다.

머리 좋은 기술관료로 화려한 경력을 쌓은 그였지만 국민에게 표를 호소하며 보여준 언변과 카리스마는 폭스에 크게 뒤졌다.

PRI 장기집권의 종식을 가져온 배경에는 세디요 대통령의 선거에 대한 중립 의지도 크게 작용했다. 대통령궁에 웅크리고 앉아서 적시에 필요한 개혁조치들을 방기했다는 비판을 들었던 그도 선거에서 취한 ‘수수방관’ 자세 덕분에 역사책에는 민주화에 기여한 인물로 기록될 것이다.

이번 선거의 최종 승리자는 뭐라 해도 멕시코 국민이다. 멕시코시티 중심가에 있는 천사의 탑 주변에 모여 ‘폭스 승리’ ‘멕시코 만세’ ‘우리가 이겼다’고 외친 이들이야말로 투표를 통해 평화로운 혁명을 달성한 자랑스러운 시민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선거는 독립 이후 온갖 시련을 겪은 멕시코 정치가 갖지 못했던 자유로운 정치적 의지를 가진 진정한 시민의 탄생을 예고하고 있다. 71년 만에 정권교체를 달성한 역사의 현장에서 국제참관인으로 멕시코 총선을 지켜본 것이 가슴 뿌듯했다.

손봉숙<중앙선거관리위원회 멕시코대선 유엔 참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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