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프로기사 차민수 4단]실명소설 '올인' 출간

  • 입력 2000년 7월 4일 18시 44분


난다 긴다하는 포커 플레이어들이 모두 모이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포커 게임으로 연간 100만달러 이상을 수입을 올리는 ‘월드 클래스 플레이어’.

그러면서도 90년대 초반 후지쯔배 등 세계대회에서 조치훈(趙治勳) 9단을 비롯한 일본의 9단들을 상대로 연승을 거두며 돌풍을 일으켰던 한국기원 소속 프로 4단.

포커와 바둑에서 모두 일가(一家)를 이룬 승부사 차민수(車敏洙·49) 4단.

최근 어머니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미국에서 귀국한 그를 만났다. 포커 플레이어라면 뭔가 음습한 분위기에 매서운 눈매를 가졌을 것이라는 선입견은 완전히 착각이었다. 선한 눈매에 화사한 웃음과 서글서글한 말솜씨는 마치 편안한 옆집 아저씨와 같았다.

그가 한때는 마약 중독자에 전재산이 18달러밖에 없는 빈털털이인 적도 있었다는 느낌을 전혀 받을 수 없었다.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이 최근 ‘올인’이라는 제목의 실명소설로 출간됐다. 올인(All In)은 갖고 있는 모든 돈을 이 한판에 건다는 포커 용어. 그의 인생을 살펴보면 ‘올인’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승부로 점철된 것이었다.

그는 75년 미국으로 건너간 뒤 포커와 우연히 인연을 맺는다. 심심풀이로 라스베이거스 카지노를 들락거리던 그에게 어느날 캘리포니아주립대 포커학과 교수인 치프 존슨이 찾아왔다.

“그는 바둑이 5급 정도였는데 내가 프로기사라는 얘기를 카지노에서 듣고 서로 바둑과 포커를 가르쳐주자고 제의했어요. 두말할 것 없이 오케이했죠.”

그는 존슨에게서 ‘포커는 확률’이라는 점을 배우면서 포커에 새롭게 눈을 뜬다.

이어 단 게롯이라는 포커 플레이어를 우연히 만나 ‘사기 포커’ 기술에 대해서도 배우게 된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는 타고난 재질덕에 강1급 정도의 포커실력을 갖추게 된다.

그러나 카지노를 드나들면서 그는 코카인 등 마약을 배웠다. 처음엔 코카인 정도였으나 마리화나 발륨 등 여러 종류의 마약에 손을 댔다. 가정은 파탄 직전이었고 그 역시 마약 파티와 환각에 푹 빠졌다. 어느날 그는 죽음과 같은 환각을 경험했다. 더이상 마약을 했다간 죽는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그는 단호하게 마약을 끊었다. 마약을 끊고 새 출발을 했지만 한번 파탄난 가정은 회복되지 않았다. 결국 그는 전재산과 아이들을 부인에게 넘기고 이혼한 뒤 한국의 어머니곁으로 왔으나 돌아온 것은 냉대뿐이었다.

차 4단이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을 때 전재산은 단돈 18달러과 낡은 캐딜락 한대. 그는 차안에서 잠을 자며 18달러를 밑천으로 내기바둑을 둬 돈을 모으기 시작, 1600달러를 모아 다시 카지노로 달려갔다. 당시 그의 포커 실력은 바둑으로 치면 강 1급정도. 카지노 전속 플레이어로 취직해 연 5만달러 정도를 벌 수 있는 정도였지만 톱 클래스가 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카지노 딜러였던 김송희씨와 재혼, 생활에 안정을 찾으면서 본격적인 포커 공부를 시작했다. 하지만 공부의 성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초조해 하는 그에게 부인은 이렇게 충고했다.

“마약으로 망가진 머리와 가슴속에 들끓는 분노와 증오 때문에 공부에 집중할 수 없는 거예요. 포커 공부를 위해선 모든 것을 잊으세요. 어머니부터 전부인까지 모두 용서하고 사소한 집안 일일랑 모두 잊으세요.”

이후 그는 ‘머리속 디스켓 비우기’라는 작업을 통해 집 전화번호까지 잊을 정도로 2년동안 이론과 실전에 몰두했다.

3년만인 88년 그의 수입은 100만달러를 넘어섰고 그해 세계포커대회 홀덤 부문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10년동안 그는 부동의 1위였고 평균 승률이 9할에 이를 정도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승부에 대한 그의 철학은 확고하다.

“전 요행을 바라는 갬블러(gambler)가 아니라 확률과 모든 감각을 동원해 승부를 겨루는 플레이어(player)지요. 저는 포커를 ‘일’로 생각합니다. 흔히 포커같은 게임에 대해 운이 7할이고 기술이 3할이라며 ‘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고 하지만 저는 실력이 99%, 운이 1%라고 생각해요. 운은 돌고 도는 거고 실력은 불변이잖아요.”

그의 이름이 한국에 알려진 것은 포커가 아닌 바둑 때문이었다.

무명에 가까웠던 그는 후지쯔배에 미국대표로 출전해 조치훈 9단을 비롯한 일본의 강자들을 연파하면서 2년 연속 8강에 오르는 파란을 일으켰다. 74년 입단후 바둑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고 15년만의 공식대국을 갖는 기사가 어떻게 일본의 9단을 이길 수 있는지 모두들 불가사의로 여겼다. 이에 대해 당시 서봉수 9단은 “모든 승부에는 기와 배짱이 중요한데 차4단은 입신의 경지에 이른 포커실력과 승부사 기질을 바둑에 연계시킨 것 같다”고 분석했다. 한때 한국에 정착해 바둑기사로 활약할 생각을 가졌던 그는 자신의 본업은 포커라는 생각을 굳혔다.

“하지만 바둑은 내 평생의 동반자입니다. 이창호 조훈현 등 최정상급은 몰라도 일본의 9단 정도는 언제든지 꺾을 수 있도록 실력을 연마하고 있습니다.”

<서정보기자> suh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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