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중훈의 세상스크린]"아빠, 집에 또 놀러와요"

입력 2000-07-03 19:08수정 2009-09-22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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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몸살이 나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을 정도였지만 선약 때문에 약속장소로 나가는데 한 분이 팬이라며 다가와서는 사인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사인을 해주고 가려는데 이 분이 길거리에 서서 제 영화에 대해 총평을 해주시는 겁니다. 바쁜데다 너무 아파 시무룩한 표정으로 의례적인 인사를 한 뒤 돌아서는데 뒤에서 작은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렇게 안봤는데 건방지구먼.” 누가 감사하지 않다고 했습니까? 저도 아플 때가 있잖아요.

▼아파도 내색 못하는 속사정▼

사우나에서 열기를 참으며 5분짜리 모래시계가 끝나 가려는 참에 한 분이 들어오십니다. 이종사촌 동생의 친구가 탤런트다, 길거리에서 영화촬영 장면을 본 적이 있다는 말씀을 이어가십니다. 살이 벌개지고 곧 몸이 데일 것 같이 뜨거워 고통스럽지만 금방 나가겠다고 말을 못합니다.

절친한 친구가 만나자고 전화해 왔지만 영화와 광고촬영 인터뷰 등 두달치 스케줄이 잡혀있어 들어줄 수 없었습니다. 다음날 폭우가 쏟아져 촬영이 취소됐고 모처럼 사우나 휴게실에서 쉬고 있는데 그 친구를 우연히 만났습니다. 자기를 무시한다고하느냐며 흥분하는 친구와 오해를 푸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는 대부분 밤장면이라서 촬영중 집에 들어가지 못한 날이 많았습니다. 낮에 잠깐 짬을 내 집에 들어갔더니 다섯살 먹은 큰 녀석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아빠! 우리 집에 또 놀러오세요.” 울고 싶습니다.

황영조 선수가 “훈련이 너무 힘들어 차라리 이대로 죽고 싶을 때도 있다”고 말했듯 영화촬영도 24시간 잠 안자고 일하는 건 고생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육체적으로 힘듭니다. 천신만고 끝에 촬영을 마치고 난 뒤 관객 반응을 기다리는 일은 더욱 피를 말립니다.

정말이지 영화가 지긋지긋해지기도 합니다. 얼굴이 알려져 사생활을 잃고, 바쁜 탓에 소중한 관계들이 무너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스트레스를 이야기해봤자 여유있고 사랑받는 놈이 행복에 겨워 저렇다고 비아냥거릴까봐, 전 아무 걱정도 없는 사람처럼 살아가야 합니다.

물론 복받은 인생임에 틀림없고 늘 감사하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했다고 해서 추운 겨울날 찬 물로 그의 양말을 빠는 손도 행복할까요? 정말 모든 것이 행복할 수 있을까요?

▼궂은 날 있으면 맑은 날도…▼

남의 내막을 속속들이 모를 뿐 누구에게나 궂은 날, 맑은 날이 있을 겁니다. 비바람을 맞고 궂은 날을 견딘 땅은 맑은 날이 오면 꽃을 피우지만, 맑은 날만 본 땅은 사막이 된답니다. 아픔을 참고 견딘 조개가 더 아름다운 진주를 만들 듯이, 고난을 만났을 때 훗날을 생각하며 이겨내야 하는 것이겠지요. 걱정 근심 괴로운 짐 아니진 자 누가 있겠습니까?

박중훈 <영화배우> joonghoon@seromesof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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