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준칼럼]정상회담 약효 과신말아야

  • 입력 2000년 6월 28일 20시 29분


독일의 세계적 철학자 헤겔은 민중은 정치가들의 위업을 자주 잊는다고 보고 그것을 ‘역사의 망은(忘恩)’이라고 표현했다. 이러한 현상은 일상생활에 직결된 국내정치의 업적에 비해 그렇지 못한 대외정책에서의 업적의 경우에 흔해, 미국의 표준적 정치학 교과서들은 외교의 업적은 유권자들에게 쉽게 잊혀지곤 한다고 가르친다.

보기를 들어보자.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끈 처칠의 보수당정부는 승전직후에 실시된 총선에서 재집권에 실패했다. 영국 국민은 보수당정부의 공로를 인정하면서도 그러나 전후복구의 지도력은 노동당에 맡기고 싶었던 것이다. 걸프전쟁에서의 승리로 미국의 국제적 위신을 크게 높였을 뿐만 아니라 소련의 해체로 상징되는 공산권의 붕괴를 유도해낸 위업을 성취한 부시대통령의 경우도 1년 뒤에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에 실패했다. 국내경제가 나빠지자 미국 국민은 ‘세계사적 전환의 영웅’을 가차없이 버린 것이다. 닉슨대통령의 경우도 비슷했다. 소련과의 데탕트(긴장완화)수립,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관계개선, 베트남전쟁의 종전 등 그때로서는 국제정치적으로 커다란 대돌파를 이룩해냈지만, 1년 뒤에는 워터게이트 추문으로 하야해야 했다.

▼국민들은 새로운 상황에 민감▼

국내에서도 비슷한 보기를 들 수 있다. 1990년 6월에 노태우(盧泰愚)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 사이의 정상회담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렸을 때만 해도 국내외가 얼마나 흥분했던가. 같은 해 10월에 한-소수교가 성사되고 다음 해 4월에 고르바초프가 제주도를 방문했을 때도 그 열기는 지속되지 않았던가. 그러나 다음 해 3월에 실시된 14대 총선에서 여당은 과반수 확보에 실패하고 말았다. 아니, 88서울올림픽의 감격과 흥분이 과연 얼마나 지속됐던가.

2주 전에 평양에서 폐막된 남북정상회담은 확실히 민족적 쾌거였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동아시아 국제관계와 남북관계에 긍정적으로 큰 영향을 미칠 이 대사(大事) 하나만으로도 역사에 길이 기억될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정부와 여당은 이 국제적 민족적 업적이 국민에게 쉽게 잊혀질 수 있음을 명심하는 것이 좋겠다. 국민이 감격과 흥분에 젖어 있는 시간은 대체로 짧기 마련이며 그들은 언제나 그 이후의 새로운 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법이다.

이렇게 볼 때 정상회담 직후에 터진 ‘의료대란’ 또는 ‘의약분업파동’은 남북관계의 장래를 생각할 때 참으로 안타깝고 불행한 일이었다. 정상회담 때 조성된 민족화합과 국민공감의 좋은 분위기를 그대로 장기간 지속시켜 남북관계를 크게 진전시키는 데 필요한 에너지로 삼을 수 있었을 터인데 그만 일찍 식혀버린 결과를 낳아버렸기 때문이다. 정부와 여당의 고위당국자들이 파동이 그처럼 크리라는 것을 예견하지 못하고 밀어붙였다면 그야말로 앞뒤의 타이밍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 ‘천려일실(千慮一失)’의 어리석음을 저질렀다는 비판을 받아도 할 말이 없게 됐다.

물론 정상회담 때의 뜨거운 분위기가 가라앉은 것을 부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다. 남북관계를 보다 더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접근할 수 있게 만든 측면도 있기 때문이다. 한반도 상황을 자칫 감상주의적으로 파악할 때 발생할 거품을 미리 제거해 준 효과도 인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아쉬움을 지울 수 없는 것은 정상회담의 역사성이 너무나 컸고 그것이 불러일으킨 감동이 너무나 진했기 때문이다.

▼실질적 성과 얻는데 총력을▼

정치는, 그리고 정치지도자는 언제나 현실세계에 나타나는 결과로써 재단되고 평가된다. 그런 점에서 정부와 여당은 정상회담 때의 분위기에 너무 연연하지 말고 심기일전해 앞으로의 국정운영에서 새로운 실적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서운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툭 터놓고 말해 정상회담의 국내정치적 약효를 과대평가하지 말라는 뜻이다. 오늘날에 나타난 것과 같은 행정의 난맥상, 예컨대 행정부서들 사이의 혼선 같은 것이 계속 드러난다면 국민의 외면은 빨라질 것이다. 앞으로 남북공동선언이 어떻게 실천될 것이냐에 따라서도 국민의 태도는 달라질 것이다. 이산가족문제나 경제협력문제 등에서 남쪽이 지나치게 양보하는 것 같다는 믿음이 확산되면 더 이상 민족적 당위론이 먹혀들지 않을 것이다. 참으로 어려운 고비들이 기다리고 있다. 그 고비를 넘기기 위해 우선 이산가족 재회가 지속적으로 실현되는 가운데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의 서울답방이 빠른 시일 안에 이뤄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김학준<본사편집논설고문·인천대총장>ha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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