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민병욱/"말을 삼가라"

  • 입력 2000년 6월 2일 19시 34분


꽤 높은 자리까지 올라간 한 정치인의 사람 다루기는 유명하다.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을 설득하다 안되면 술을 권한다. 상대가 취해 둘 사이의 이견에 대한 온갖 얘기를 다 하게 한 다음 아무런 결론도 내리지 않고 그를 돌려보낸다. 물론 자신은 함께 마시는 시늉만 냈지 술은 한 잔도 입에 대지 않았고 현안에 대해서도 듣기만 했다. 효과는 다음날 나타난다. 같은 문제에 대해 상대가 또 고집을 부리면 “어제는 취해 딴 얘기를 하더니…”라고 한마디만 하면 상대는 금세 고개를 숙이더라는 것이다.

▷그는 “입을 다물고 있을 때 정치인은 더 많은 힘을 얻는다”는 금언을 철저히 활용했다. 말수가 적으면 실제보다 훨씬 커 보이고 힘이 있어 보인다는 것이다. 영향력 있는 정치인인 자기가 입을 다물면 다물수록 상대는 초조해지고 결국 해서는 안될 말, 바로 후회하게 될 말까지 쏟아놓더라는 것이다. 본인의 약점에 대한 감춰야 할 정보는 물론 상대가 미처 모르고 있던 다른 정파의 분위기나 전략까지 얘기하는 경우도 있었다니 술 몇 잔 대접한 값보다 훨씬 이문이 남는 장사를 한 셈이다.

▷엊그제 한나라당과 자민련의 주요 간부들이 각각 ‘폭탄주 회식’을 했다고 해서 화제다. 한나라당은 이회창총재의 총재 재선 자축 모임에서, 자민련은 의원총회 뒤풀이로 폭탄주를 대여섯 순배씩 돌렸다는 것이다. 정치인들이 폭탄주를 마신 게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니 굳이 그걸 탓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무슨 말들이 오갔는지는 무척 궁금하다. 듣기로는 상대 정파의 행태에 대한 격한 비판과 야유성 발언이 오갔다는데 그런 것들이 가뜩이나 꼬인 정치 상황을 더 어렵게 만들지 않을까 걱정도 된다.

▷‘권력을 경영하는 48법칙’이란 책을 낸 로버트 그린이란 사람은 “말을 삼가라”를 제4법칙으로 내놓았다. 그는 “특히 비꼬는 말을 삼가라. 순간적 만족을 얻을지 모르지만 그보다 훨씬 더 큰 대가를 치르게 된다”고 부연했다. 한나라당이나 자민련의 폭탄주 회식 참가자 중엔 큰 정치적 꿈을 키우거나 당장 국회에서의 임명 동의 문제에 걸려 있는 사람도 있다. 과연 폭탄주 몇 잔의 호기를 부릴 때였는가.

민병욱<논설위원>min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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