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황호택/'아내 착각하기'

  • 입력 2000년 5월 30일 20시 25분


재일교포 여류작가 유미리(柳美里)의 자전적 에세이 ‘훔치다 도망치다 타다’에는 어린 시절 수학교사의 성추행을 거부하지 않았던 고백이 들어 있다. 수학선생은 특별지도를 해주겠다며 수업 시작 두시간 전까지 오라고 한다. 특별지도는 별난 것이었다. 수학선생은 유미리의 귀에 복잡한 곱셈과 나눗셈을 주절거리면서 한 손으로는 원피스 자락을 끌어올리고 하복부를 더듬었다. 20년전 일본 이야기다. 지금 이런 짓을 했다가는 십중팔구 고발을 당하고 합의를 못 봐 구속됐을 것이다.

▷우조교 사건으로 홍역을 치른 서울대가 2학기부터 성희롱 규정이 추가된 학칙을 시행할 계획이고 고려대 등에서도 여학생회를 중심으로 학칙 개정이 추진되고 있다. 서울대 학생들은 교수가 권위를 이용해 저지를 수 있는 제2의 우조교 사건을 막을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요구해 결국 교수들도 적용대상에 포함되는 모양이다. 18세 여대생을 ‘아내로 착각한’ 환경운동가 장원씨나 여직원들과 여러 소문이 떠도는 산업연구원장이 현직 교수이거나 교수 출신이고 보니 학생들이 그런 주장을 펴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얼마 전 여자대학으로 자리를 옮긴 분이 선배교수들에게 남자 교수의 몸가짐에 관해 자문을 했다. 수업을 할 때 예쁜 여학생에게는 5초 이상 눈길을 주지 마라. 조금 용모가 떨어지는 학생과 시선이 마주치면 10초 이상 눈길을 주라. 학생들이 연구실로 찾아왔을 때는 반드시 문을 열어놓고 대화를 나눠라. 그분은 이 계명을 철저히 지키고 있다고 한다.

▷성희롱 성폭력 성추행 등 ‘성’자 돌림 사건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 남성들이 더 공격적이 됐다거나 윤리의식이 희박해진 근거는 없다. 이전에는 피해를 본 여성들이 쉬쉬하며 그냥 넘어갔지만 이제 공개적으로 문제삼기 시작한 것뿐이다. 그동안 남성우위의 문화에서는 여직원에게 커피 심부름을 시키거나 저녁 회식 때 술을 따르게 하거나 장난기 섞인 신체접촉이 별로 문제될 것이 없었지만 지금은 패가망신의 지름길이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착각’하지 말고 일찍 귀가해 다소 신선감이 떨어지더라도 아내를 열심히 챙겨줄 일이다.

<황호택논설위원>hthwang@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