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의 세상읽기]5·18이 '남의 제삿날'인가

  • 입력 2000년 5월 23일 19시 38분


5월 18일 저녁 서울 신촌의 연세대학교 반원형 노천극장에서는 무려 2만여명의 인파가 물결쳤다. 이 대학이 자랑하는 '아카라카 응원제'였다.

인기 댄스그룹과 가수들도 출연한 이 행사에는 연세대생은 물론이요 다른 대학 학생과 중고등학생들까지 적지 않게 몰려들었다. 5000원짜리 입장권이 일찌감치 동이 나자 미처 표를 구하지 못한 학생들은 '무단입장'을 시도했고, 곳곳에서 학생들과 주최측이 고용한 경호업체 직원들 사이에 불미스러운 충돌이 벌어졌다.

다음날 새벽부터 연세대 인터넷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는 이날 행사를 비판하는 글이 오르기 시작했다. 연세대 대동제를 상업적인 공연무대로 전락시켰다면서 '아카라카'의 장삿속을 비난하고 경호업체 직원들의 폭력행사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주조를 이뤘다. 응원제의 수입지출 내용을 투명하게 공개하라는 요구까지 나온 '아카라카 논란'은 그 후로도 며칠 동안 계속됐다.

같은 날 오후 이 대학 교문 앞에서는 다른 행사가 열렸다. 연세대 조국통일위원회가 주최한 '5·18 광주민중항쟁정신 계승대회'였다. 여기에는 약 50명의 학생들만이 참여했다. 그런데 이 두 행사를 실시간으로 보도한 인터넷신문 '오마이뉴스' 기사는 응원단 '아카라카' 관계자가 "하필이면 왜 5·18에 이런 행사를 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남의 아버지 제삿날에 왜 우리가 슬퍼해야 하느냐"고 말했다고 전했다. 물론 그 '관계자'의 실명은 밝히지 않았다. 그러자 이 기사를 보고 흥분한 사람들이 연세대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 대학당국과 '아카라카', 그리고 연세대생들을 비판하는 글을 올렸다.

이것은 실로 '놀라운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학생들은 응원제 예산공개나 경호업체 직원들의 폭력행사 문제, 또는 출연한 연예인들의 '수준'을 둘러싸고 욕설까지 섞어가면서 격렬한 논전을 벌이면서도 5·18과 관련된 비판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이다. 한 마디로 너무 '썰렁한 말씀'이라 뭐라고 말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아카라카' 관계자 가운데 누가 '남의 아버지 제삿날 발언'을 했는지, 또는 정말 그런 말을 했는지를 지금 확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응원제를 준비한 '아카라카' 관계자들이 대학당국과 협의해서 이 날을 잡았다는 사실이다. 대학측은 이 행사에 재정적 행정적 지원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니까 이렇게 말해도 될 것이다.

따라서 '택일'과 관련된 진실은 둘 가운데 하나다. 첫째 '아카라카' 멤버들과 대학 당국자의 머리 속에는 5월 18일이라는 날의 의미가 처음부터 입력되어 있지 않았다. 둘째 5·18을 기억하고는 있었지만 '남의 아버지 제삿날'이기 때문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둘 가운데 어느 쪽이든 문제는 마찬가지로 심각하다.

나는 대학생들이 축제를 열어 마음껏 낭만을 즐기는 것을 보면 기분이 아주 좋다. 내가 속한 세대는 정치사회적 환경이 너무 나빠서 그렇게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들에게 최루탄과 화염병을 물려주지 않은 것을 나는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더러 노는 방식이 다르지만 그거야 세대마다 노는 법이 다르기 마련이고, 어느 작가의 말처럼 '똑같은 것보단 다른 것이 더 좋으니까' 상관없다. 그러나 이번 연세대의 '아카라카'는 너무 나갔다.

좋다. 백보를 양보해서 5·18이 '남의 아버지 제삿날'이라고 하자. 그렇다고 해도 구태여 그날에, 보란듯이 불을 밝히고 놀이판을 벌일 것까지는 없지 않은가. 다른 날도 수없이 많은데 말이다. 그런 정도의 '역사와 인간에 대한 예의'를 보여주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가.

개성과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회란 그런 것이 아니다. 더욱이 5·18 희생자는 '남의 아버지'가 아니지 않은가. 이른바 '학생운동권'의 교조와 독선 때문에 다수 학생이 '운동'에 넌더리를 내게 되었다는 사정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연세대 당국과 '아카라카'가 보여준 것처럼 역사에 대한 무지와 정신적 천박함을 정당화하는 알리바이가 될 수 있을지는 의문스럽다.

유시민<시사평론가> denkmal@hite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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