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프리뷰]킬리만자로…쌍둥이 형제의 질긴 운명

  • 입력 2000년 5월 12일 00시 05분


‘닮은 꼴’일 수밖에 없는 쌍둥이 형제의 증오에 찬 언쟁과 총성, 흘러내리는 붉은 피…. 자극적인 도입부로 열리는 영화 ‘킬리만자로’는 밑바닥 인생, 그것도 막다른 골목에 몰린 남성들의 운명과 슬픈 몸부림을 끌어 안고 있다.

총기 자살과 잇따른 주먹 다짐 등 초반부터 폭력이 넘쳐나지만 액션 영화로 보기는 힘들다. 영웅을 만들거나 화면의 기교를 부리기보다는 냉정하면서도 현실적인 접근법으로 밑바닥 인생들을 그려냈다.

비루한 핏줄을 거부하며 출세만을 위해 뛰어온 악질경찰 해식(박신양 분), 배신자라는 멍에 속에 살아가는 왕년의 주먹 번개(안성기), 횟집에 인생을 건 김중사(정은표), 종교에 매달리는 불구자 전도사(최선중)….

주먹 인생으로 전전한 번개 일행이 떳떳하게 살겠다며 횟집을 내겠다는 것은 결코 큰 꿈이 아니다. 하지만 영화는 이들 누구에게도 ‘삶의 역전극’을 허용하지 않을 만큼 차갑다. 이들이 때로 희망을 말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낼 때조차도 관객은 깨질 것 같은 유리그릇을 보는듯한 불안감을 느낀다.

영화는 살인사건에 연루된 쌍둥이 동생 해철의 총기자살로 직위해제된 형사 해식을 따라 진행된다. 20여년만에 고향 주문진을 찾은 그를 기다리는 것은 죽음 앞에서도 화해할 수 없었던 동생의 ‘흔적’이다. 판에 박은 듯 닮은 얼굴 때문에 해식은 이 지역을 휩쓸었던 해철로 오인받아 종두 패에게 테러를 당하는가 하면, 해철의 옛 보스였던 번개(안성기)의 환대를 받기도 한다.

박신양이 쌍둥이 해식과 해철의 1인2역으로 등장하는 설정은 의미심장하다. 해식이 죽은 해철로 살아가면서 “정말 나는 누군가?”라고 되묻는 장면은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의 끈, 그리고 인간의 이중성을 암시한다.

영화는 그 무거움이 부담스러웠던지 중간중간 해식과 번개 일행의 우정과 천진난만한 일상을 끌어들이지만 다소 껄끄러워 보인다. 또 거의 모든 출연자들이 등장한 가운데 벌어지는 종두패와 번개패의 대치극은 한꺼번에 마무리지으려는 작위적 결말이라는 느낌을 준다.

박신양은 ‘편지’ ‘약속’의 부드럽고 자상한 남성의 이미지가 잊혀질 만큼 실감나게 열연했다. 안성기도 명성 만큼 묵직하게 제 몫을 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초록물고기’ 등의 조감독 출신인 오승욱 감독의 데뷔작. 18세 이상 관람가. 20일 개봉.

<김갑식기자>gs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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