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방형남/정명훈의 파리 재입성

  • 입력 2000년 5월 7일 21시 43분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지휘자 정명훈(鄭明勳)씨가 25일부터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프랑스의 루앙, 툴루즈 등과 스페인의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등에서 연주회를 갖는다. 정씨는 이에 앞서 1일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의 음악감독 업무를 정식으로 시작했다.

프랑스 교향악단의 음악감독(상임 지휘자)으로 다시 파리에 입성한 정씨의 감회는 남다를 것이다. 6년전 자신을 세계적 지휘자의 반열에 올라서게 한 오페라 바스티유를 타의에 의해 떠난 아픈 과거가 있기 때문이다.

정씨 본인보다야 못하겠지만 필자에게도 그의 파리 재입성은 기쁜 소식이다. 파리 특파원 시절 그가 바스티유 음악감독 또는 상임지휘자로서 빚어낸 많은 오페라와 오케스트라 연주를 감상하며 ‘자랑스러운 한국인’인 그가 겪은 기쁨과 슬픔까지 한국독자들에게 상세히 전한 인연이 있기 때문이다.

지휘자 정씨가 프랑스와 벌인 싸움과 화해의 과정에는 프랑스의 문화가 녹아있다. 30대의 동양인(바스티유에 영입될 때 정씨의 나이는 37세였다)을 프랑스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바스티유의 음악감독으로 초빙한 것은 프랑스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국적이나 나이에 상관없이 실력이 있으면 받아들이는, 적어도 문화에 관한 한 지극히 관대한 프랑스의 정신이 정명훈을 국립 오페라의 음암감독으로 만든 것이다. 파리에는 그런 사례가 많다. 오늘날 프랑스 문화를 대표하는 퐁피두센터, 루브르박물관의 유리 피라미드, 라데팡스의 그랑다르쉬(개선문 모양의 빌딩)는 모두 프랑스인이 아닌 외국인의 작품이다.

94년 프랑스 문화부와 오페라 바스티유 경영진이 힘을 합쳐 정씨를 내보낼 때도 프랑스 문화의 저변을 이루는 음악팬들은 정씨의 퇴장을 매우 애석해했다.

정씨는 프랑스 음악팬들의 사랑을 아직도 잊지 않았는지 파리 복귀 기자회견에서 바스티유측의 처사를 “바람의 방향이 종종 바뀌듯이 정책이 바뀌었기 때문”이라며 대수롭지 않은 것이었다고 말했다. 대신 “파리를 떠난 적이 없으며 프랑스 음악인들과는 계속 만나왔다”는 말로 자신과 프랑스의 문화는 헤어진 적이 없었음을 강조했다.

우리나라 문화정책 책임자들은 프랑스를 본받아야 할 문화선진국으로 지목하고 닮으려 한다. 그래서 프랑스처럼 문화예산을 국민총생산(GNP)의 1%선으로 늘렸다는 것을 자랑한다. 그러나 정씨의 경우에서 보듯 문화는 숫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비록 외국인이라도 문화적 수준을 높이는 데 기여할 만한 실력있는 사람이면 기꺼이 끌어안는 자세가 있어야 한다.

마침 서울시교향악단에 러시아 볼쇼이 극장의 음악감독 겸 예술감독인 마르크 에름레르가 상임지휘자로 초빙돼 11일과 12일 취임기념 연주회를 갖는다. 프랑스인들이 정명훈을 사랑하듯 한국 음악팬들이 에름레르를 사랑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파리에 정명훈이 있는 것을 자랑하는 대신 서울에 ‘외국산 정명훈’이 있음을 내세울 정도는 되어야 문화선진국이 될 수 있다.

방형남 <국제부 차장> hnbhang@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