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타임스]되돌아본 뉴욕100년/1900~1910년

  • 입력 2000년 3월 3일 00시 05분


《‘미국의 심장’ 뉴욕시의 지난 100년 발자취를 더듬어 본다.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이민자들의 고난과 폭력으로 얼룩진 100년 전의 역사. 이제 빌딩숲 속에서 문화를 꽃피우며 세계 금융의 메카로 우뚝 솟기까지 사회상의 변모를 10년 단위로 묶어 소개한다. 뉴욕이 시로 승격한것은 1898년.》

사람들은 뉴욕시의 건립이 로마의 건국과 맞먹는 역사적 의미를 지닌 사건이라며 환호했다. 그러나 1898년 1월 1일의 여명에 비친 뉴욕은 전과 그리 달라진 것 같지 않았다. 불규칙하게 뻗어 있는 뉴욕의 빈민가에서는 사람들이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하루하루 근근히 생계를 이어나갔다.

릴리안 월드 같은 사회운동가들은 다른 나라에서 이민을 와서 가난하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탈출구를 마련해주려고 애썼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외국인들이 점점 늘어나는 것에 대해 경계심을 높여가고 있었다. 1902년에 뉴욕항의 엘리스섬에 도착한 이민자는 거의 50만 명이나 되었다. 그리고 1900년대가 끝날 무렵 뉴욕에 새로 도착하는 이민자의 숫자는 매년 100만 명에 육박했다. 이 이민자들 중 4분의 1이 뉴욕에 정착했다.

1908년에 시어도어 빙햄 경찰국장은 노스아메리칸 리뷰에 기고한 글에서 뉴욕시의 범죄자들 중 적어도 절반이 유대인들이라고 주장했다. 엘리스섬의 이민 검역소에서 일했던 의사 찰스 밴크로프트는 이탈리아인들의 얼굴이 ‘지성의 결핍’을 드러내고 있다고 썼다. 이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동유럽과 남부 유럽에서 새로 이민 온 사람들이 유전적으로 범죄와 질병과 타락에 쉽게 빠질 수 있는 기질을 갖고 있으므로 이들이 뉴욕에 들어오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뉴욕이라는 새로운 대도시를 이끌고 있던 사람은 로버트 밴 위크 시장으로, 그는 뉴욕의 태머니 홀을 근거지로 활동하던 민주당 단체 태머니파의 보스 리처드 크로커가 직접 선정한 인물이었다. 태머니파는 지금도 가끔 뉴욕 시정의 부패상 및 보스 정치를 빗대어 표현하는 말로 쓰이고 있는데, 아일랜드계 이민자 출신인 크로커는 거칠면서도 냉소적이고, 약삭빠른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내세운 시장 후보가 1901년의 선거에서 패하자 자신의 도시 뉴욕이 이제 끝장이 났다고 생각했는지 1902년에 자신의 전리품을 모두 갖고 뉴욕을 떠나버렸다. 크로커가 떠난 후 태머니파의 지도자가 된 사람은 찰스 프랜시스 머피였다. 그는 점점 숫자가 늘어나고 있는 유대인과 이탈리아인 유권자들이 정치가들이 생색을 내면서 흘려주는 빵부스러기 이상의 것을 원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태머니파가 선거에서 승리를 거두도록 하기 위해 의미 있는 사회적 경제적 개혁을 지지했다.

뉴욕시의 정화작업은 이미 그 이전 세대에서부터 추진력을 얻고 있었다. 성직자 기업가 도덕운동가들의 후원 속에 이루어진 부패 폭력 음란에 대한 공격은 점점 세력을 얻어가고 있는 진보주의와 결합했다.

뉴욕에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음을 보여주는 가장 눈에 띄는 현상은 도시 외관의 놀라운 변화였다. 1902년에 크로커가 뉴욕을 떠날 무렵 사람들이 오랫동안 고대해왔던 지하철은 절반쯤 완성되어 있었다. 또한 새로 완성된 플랫아이언 빌딩은 수직으로 하늘을 향해 뻗어 올라가기 시작한 도시의 새로운 모습을 강조했다. 이스트강을 가로지르는 두번째 다리인 맨해튼다리의 공사도 한창 진행 중이었고, 세번째 다리의 건설 계획도 세워져 있었다. 잡지 ‘하퍼스 위클리’는 1902년 11월에 “마치 거대한 힘이 땅 밑에서 들썩이면서 매시간 새로운 건물들을 밀어 올리고 있는 것 같다”면서 20세기 중반이 되면 뉴욕은 ‘규모 화려함 권력면에서 경쟁자가 없는’ 세계의 수도가 되어 있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러나 위대한 도시 뉴욕의 첫 10년에는 나름대로의 혼란과 비극도 있었다. 1900년에는 인종소요가 일어났고, 1904년에 증기선 제너럴 슬로컴 호에서 발생한 화재는 1000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갔다. 1907년에는 금융공황이 월스트리트를 덮쳤다.

그러나 새로 세워진 펜실베이니아역의 모습은 뉴욕이라는 도시의 자신감과 낙관주의를 증언하고 있었다. 로마의 화려함과 미국의 산업적인 힘을 함께 표현하고 있는 이 건물은 인간들이 이룩한 것 중에 시간마저 손댈 수 없을 만큼 위대한 것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람들의 화려한 망상을 구현하고 있었다.

(http://www.nytimes.com/specials/nyc100/nyc100-1-quinn.html)

▼1902년 뉴욕은▼

어느 날 갑자기 파리를 제치고 런던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로 부상한 뉴욕의 4분의 1을 점령하고 있는 것은 거의 2000곳에 이르는 농장이었다. 나중에 브롱크스가 된 지역은 너무나 목가적이어서 공원관리부의 관할에 속할 정도였다. 코니아일랜드는 문자 그대로 정말 섬이었고 근처의 맨해튼비치에서는 경마장과 우아한 호텔들이 사람들을 유혹했다. 도시의 교통수단은 여전히 마차였는데 근시안적인 미래학자들은 말과 말똥이 너무 많아져서 도시의 교통을 마비시킬 것이므로 뉴욕의 성장도 중단되고 말 것이라고 주장했다. 1902년 무렵의 뉴욕에서는 개발이 폭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스트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세 개가 공사중이거나 계획 중이었고 도시의 하늘로 솟아오르는 새 건물은 매년 거의 5000채나 되었다. 도시계획이나 미관에 대해서 신경을 쓰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해안을 따라 간척이 이루어지면서 뉴욕의 규모도 커졌다. 1898년 이후 간척된 땅의 면적은 33㎢였다. 뉴욕은 웅장한 계획을 바탕으로 세워진 기념비적인 도시라는 비전과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에 의해 자생적으로 건설된 상업의 메카라는 비전 사이에서 갈등하면서 지금도 여전히 성장하고 있다.

(http://www.nytimes.com/specials/nyc100/nyc100-map.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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