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충식]'제 눈 찌르는 원숭이'

  • 입력 2000년 2월 28일 20시 10분


어느 산골, 눈이 하나 뿐인 원숭이들만 사는 마을 얘기다. 여기 두 눈이 멀쩡한 원숭이가 흘러와 살게 되자 ‘불구’들의 텃세가 이만저만 아니었다. 두 눈 원숭이는 왕따가 된 이유를 깨달았다. 그리곤 스스로 한 쪽 눈을 찔러 애꾸눈이 되었다. 그리고 나서야 잘 어울리며 편히 살 수 있었다고 한다. 하향(下向)동질화를 통해 얻은 평화와 안일이라고나 할까.

▼'법대로'에 거꾸로 가는 '대쪽'▼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는 한국 정치의 매우 특이한 존재다. 정당판의 대다수인 ‘정치 건달’들과는 다른 전문직업인 출신이다. 프로 정치인은 국회의원이 되면 취업자이지만 그것을 준비중이거나, 떨어지면 대개 법률적으로는 무직이다. 정상적인 수입이 없이 수년 수십년을 무직으로 살았다는 점에서 3김씨조차도 예외가 아니다.

성장 데뷔도 전혀 다르다. 맨주먹 불끈 쥐고 논두렁 밭두렁 상갓집 표밭을 누비며 자란 게 아니다. 정치보스 집을 드나들며 ‘눈도장’찍은 덕에 당직을 받은 적도 없다. 그는 대법원판사 변호사 선관위원장 감사원장 국무총리를 거쳐 곧바로 정당 영수급으로 화려하게 데뷔했다. 말하자면 납세나 생업측면에서 ‘결손(缺損)투성이’인 정치판에, 그럴듯한 경력과 간판으로 우뚝 선 인물인 것이다.

그는 생애 첫 대통령선거에서 일약 1000만표나 얻어냈다. 거기에는 건달 정치에 데고 물린 국민의 기대와 염원도 깔려 있다. 당권과 정권을 주고 받으며, 서로 네 탓만 하는 데 식상한 표들이, 3김정치의 권위주의 지역주의 힘겨루기 어깃장놓기에 질린 표들이, ‘이종(異種) 변종(變種) 이회창’을 통해 뭔가 바뀌기를 성원했던 것이다. 이른바 ‘법대로’‘대쪽’이미지의 ‘정상(正常)적인 잡종’이 정치판에 섞이면 뭔가 달라지지 않겠느냐고.

그러나 그는 불행하게도 ‘불구 정치’를 바꾸기 보다 스스로를 바꾸어 ‘불구’를 자청하는 식이다. 야당은 ‘법대로’와는 거꾸로 가곤 했다. 그의 심복인 서상목의원 체포를 방해하기 위한 방탄국회는 세계의 웃음거리가 되고 그 분야의 부끄러운 신기록을 세웠다. 충성파를 자임하는 정형근의원, 그와 관련한 문제에도 당사앞에 바리케이드를 쳐서 판사가 발부한 정의원 구속영장에 대한 집행을 방해했다.

이총재는 이번 공천파동을 수습한다면서 상도동의 YS에게 머리를 숙여 힘을 보태달라고 했다. 이른바 개혁공천이 ‘미숙한 대처’라고 물러서고 있다. 이총재의 상도동행은 이중의 실책이다. YS는 몇달전 민주산악회를 재건하려 한데서 보여주듯이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롤백하려는 욕망을 불태우고 있다. YS는 그 찬스가 공천파동으로 왔다고 보고 페달을 가속하려는 판인데, 이총재는 헛짚은 것이다. 나아가 3김청산을 외치던 때가 언제인데 YS의 도포자락을 부여잡고 통사정을 한다는 말인가. 그렇게 김씨들에게 등돌리고 타도를 외치다 선거때만 되면 국회의원이 되기 위해 김씨들 품에 안기곤 하던 중진들은 너무 많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가망없는 차세대’로 전락하고 말았음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도 이총재는 YS 환심을 사고 부산경남 민심을 얻는다는 명목으로 공천자를 바꾼다. 이른바 ‘개혁공천장’을 거두어 들여 낙천후 사무총장에게 발길질했던 사람에게, 단식농성으로 생떼 쓰는 사람에게 다시 공천을 준다. 시민단체에 의해 ‘부적격 별’을 단 한보관련인사 등을 공천한다. 참으로 이총재가 당초 공천발표때 정적 제거나 사당화(私黨化) 혹은 내사람 심기에 급급한 쿠데타를 한 것인지 아닌지 알 길이 없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이것이 사실이더라도 그건 부차적인 얘기다. 국민과 시민단체가 들고 일어나 물갈이를 외치는 사상 초유의 사태에 부응하는 ‘개혁공천’ 명분을 걸고 쇄신에 나선 이상, 때묻은 인물을 획기적으로 걸러보려는 정당사에 남을 진군을 한 이상, 그것을 헌신짝처럼 버리듯 물러서서는 안될 일이다.

▼'불구정치'와 정면대결 펼쳐야▼

이총재는 ‘불구 정치’에 정면으로 대응해야 한다. 타협하고 주춤거리며 불구와 동화되어야 의석수가 나아지고 그가 정치 리더로 연명(延命)할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런 잡초같은 생명력은 시대와 국민이 이회창에게 안겨준 사명이 아니다. ‘정치가 현실이다’는 소리는 이제 넌더리나고, 잡초는 이회창말고도 지천으로 널려 있다. 3김청산의 끈질긴 구호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시대가 길어지고 있는 것은, 좋든 궂든 그들 스스로 쟁취한 몫이기 때문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김충식<논설위원>searskim@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