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273)

  • 입력 1999년 11월 16일 18시 21분


그랬구나. 잠깐만 저기 슈퍼가 있는데, 그리구 빨간 불은 정육점이겠지.

나는 자꾸 팔을 잡아 당기는 미경을 가볍게 뿌리치고 채소며 쇠고기를 샀다.

그 친구 바짝 말랐더라며. 보급투쟁하러 온 거 아냐?

내 친구하고 선배가 잔뜩 사왔습디더. 벌써 준비 다 끝났을낀데.

미경이와 나는 어둡고 긴 골목 안으로 들어섰다. 외등 하나 없는 가파른 길 양쪽은 고만고만한 집들의 브로크 담이 서 있어서 저절로 비좁은 복도가 된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평지에서 세 계단쯤 올라간 낡은 시멘트 집 앞에 이르렀다. 판자 대문이 낮아서 미경이가 한 팔을 넘겨서 빗장을 더듬어 풀 수 있을 정도였다. 구식 한옥 같이 디귿자로 생긴 집이었지만 온통 시멘트로 덕지덕지 바른 날림집이었다. 마당에는 시골에서처럼 아낙네들이 속옷 바람으로 몰려나와 평상 위에서 저녁 바람을 쐬고 있었다. 이리저리 이어 붙인 방들이 열 개는 족히 되어 보였고 방 앞에마다 청년들이나 젊은 여성이 보였다. 미경이는 그들에게 한마디씩 하면서 아는 체를 하였다. 사람들은 나를 힐끔대며 쳐다보았다. 앞에 가던 미경이가 갑자기 사라져서 나는 잠깐 발길을 잃고 마당 한편에 서있었는데 바로 눈 위의 높은 곳에서 미경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니 여깁니더. 올라오이소.

쳐다보니까 세상에 그런 곳에까지 방을 들일줄은 몰랐다. 화장실과 창고가 있는 브로크 집 위에 슬라브를 치고 방을 앉힌 셈이었다. 가파른 쇠사다리가 보였다. 나는 쇠난간을 붙잡고 조심해서 위로 올라갔다. 위에는 취사 공간과 신을 벗어 놓을만한 반 평 정도의 공간 뿐이었다. 누군가 방안에 켜 놓은 불빛을 등지고 문 앞에 서있었다.

한 형 어서 와.

낯익은 목소리였다. 나는 그래도 반가움으로 가슴이 뭉클해졌다. 뭐라고 농담으로 박아줄까 하다가 그냥 그의 손을 잡아 버렸다.

그래…건강하니 다행이다.

나는 그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밑에서 보던 것 보다는 그래도 제법 넓은 방이었다. 방 구석에 비닐로 만든 미니 옷장이 있고 책상과 의자와 작은 책꽂이까지 있었다. 뒤에 섰던 미경이가 소리를 질렀다.

엄마야 저게 뭐꼬!

오른쪽 창문 앞에 긴 비닐 끈을 매어 빨래를 널어 두었다. 아마 미경이가 없는 사이에 남자들이 묵은 빨래를 했던 모양이었다. 송영태는 빙그레 웃는 얼굴이고 방에 앉았던 다른 남자가 빨래를 주섬주섬 걷으면서 말했다.

문간방 애들이 세탁기 돌리길래 우리두 꼽사리를 꼈다 왜.

야, 아직 안말랐잖아.

송이 그가 걷어서 팔에 얹은 빨래들을 만져 보면서 말했다. 청년은 나를 슬쩍 돌아보고는 얼른 플라스틱 대야에 담아서 내갔다.

그래두 인제 음식을 먹을텐데요.

얀마 빨래가 무슨 오물이냐, 왜 먹을 걸 못먹어.

방안에는 둥그런 밥상에 냄비 하나와 소주병이며 잔이 놓여 있었다. 미경이가 냄비의 뚜껑을 열고 냄새를 맡아 보았다.

문딩이들…이건 무슨 음식이고?

난 몰라, 형이 했어. 맛있던데.

내 생일 핑계대고 마 난리 장판굿을 했네예.

송영태가 그전처럼 유들유들하게 받았다.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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