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홍찬식/공부에 등 돌린 아이들

  • 입력 1999년 11월 2일 19시 48분


인천 호프집 화재참사는 희생자들이 고교생이라는 점에서 어른들에게는 더욱 충격적이다. 당시 상황은 쉽게 유추할 수 있다. 50여평의 그리 좁지 않은 술집은 학생들로 가득 차 있다. 마침 토요일 저녁이라 다들 느긋한 마음으로 술잔을 기울인다. 실내는 담배 연기로 자욱한 가운데 곳곳에서 왁자지껄 웃음소리가 터지고 짓궂은 장난이 오간다. 화마(火魔)는 순식간에 이들을 덮치고 내부는 곧 아수라장으로 변한다.

▼'학생 전용 술집'성업▼

이런 ‘학생 전용 술집’은 사실 전국적으로 한두 군데가 아니다. 청소년 음주인구도 결코 만만치 않은 숫자다. 이번 사고를 계기로 문제가 표면화됐으므로 흡연 문제를 포함한 청소년 음주대책을 조속히 세워야 할 것이다. 이와는 다른 차원에서 짚고 넘어갈 일이 있다. 학생들이 유흥가를 자주 드나들고 밤늦도록 술을 마신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공부에서 마음이 멀어져 있다는 얘기가 된다. 이런 풍조는 이번 사고와는 별개로 전부터 감지되어 왔다.

요즘 거론되는 ‘교실붕괴’현상은 학생들의 ‘공부 기피’, 심한 경우 ‘공부 혐오’의 또다른 얼굴이다. 교사들이 학생들의 흥미를 유발하지 못하고 구태의연한 수업방식을 답습하는 측면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문제의 본질은 학생들 스스로 공부에 절실한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데 있다. 한가지 학업성취 동기를 꼽는다면 대학 진학이 있기는 하다. 이 역시 2002년 대학입시부터 무시험 전형이 예고되면서 ‘공부 안해도 얼마든지 대학에 갈 수 있다’는 인식이 퍼져 있다. 특기 적성을 강조하는 것이 새 입시제도이므로 잘못된 생각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연예인을 지망한다든지 해서 처음부터 공부에 관심이 없는 학생도 상당수다.

학력저하도 두드러진다. 얼마전 한 입시 전문기관이 11년전의 모의고사 문제를 갖고 현 고1학생에게 시험을 보게 했다. 객관성 유지를 위해 같은 지역을 골라 11년전 성적과 비교했더니 전체평균점수가100점 만점에 64.9점에서 56.2점으로 8.7점이나 떨어졌다고 한다. 학생들이 공부를 하지 않는 데 따른 당연한 결과다.

어떤 사람들은 학습 목표가 달라졌기 때문에 과거와 같은 기준을 적용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즉 창의력이나 개성을 키워주는 쪽으로 교육 방향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창의력 개발과 공부 안하는 것은 엄밀히 말해 별개의 문제다. 창의력은 기본적인 학습능력이 갖춰져 있는 상태에서만 제대로 빛을 발한다. 컴퓨터 만화 등 한가지만 잘하면 된다는 주장도 있다.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우리처럼 특기나 적성교육을 위한 기초여건이 갖춰지지 않은 현실에서는 공부 안하는 구실이 되는 경우가 많다.

창의력을 중시해온 미국 교육의 예를 들어보자. 빌 클린턴 대통령은 94년 ‘The Goals 2000’이라는 이름의 교육개혁법을 제정해 ‘미국 학생들의 수학과 과학 실력을 세계 제일이 되도록 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미래는 어찌될지…▼

그 결정적인 계기는 각종 국제학력평가 비교보고서에서 미국 학생들이 선진7개국(G7)과 한국 등 다른 국가에 비해 현저히 처지는데 자극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기대만큼 성과가 나오지 않자 올해에는 교육성과가 부진한 학교를 폐쇄 조치하겠다며 으름장을 놓고 있다. 여기에는 창의력도 중요하지만 먼저 학업성취도를 높여야 한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이런 노력은 다른 선진국들도 마찬가지다.

우리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높은 교육열이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초중고교시절 대학진학을 목표로 어느 나라 학생보다도 공부를 열심히 한 덕분이었다. 입시병의 문제가 지적되기도 하지만 과열에 따른 부작용일 뿐 경쟁 자체는 긍정적인 면이 많았다. 이런 강점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원인은 여러가지다. 이론에 치우친 교육정책, 가치관 변화, 가난을 모르고 자란 신세대들의 목표상실, 놀자판 사회분위기 등….

우리는 국제학력경시대회에서 선진국 학생들을 누르고 뿌듯해 하면서 그들을 흉본 적이 있다. ‘돈은 많지만 머리는 별로…’라면서. 이런 추세라면 우리가 그런 꼴이 안된다고 장담하기 어렵다. 미국과 같은 부자나라는 학생들이 공부를 못해도 별 상관이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여전히 IMF체제 아래에 있고 훨씬 가난한 우리가 공부마저 안한다면 미래는 어찌될까.

홍찬식<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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