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입력 1999년 10월 17일 18시 49분
공유하기
글자크기 설정
서로 가는 곳을 말하지 말자.
너에게는 나를 떠나버릴 힘만을
나에게는 그걸 노래부를 힘만을
눈이 왔다, 열한시
평평 눈이 왔다, 열한시
창밖에는 상록수들 눈에 덮이고
무엇보다도 희고 아름다운 밤
거기에 내 검은 머리를 들이밀리
눈이 왔다, 열두시
눈이 왔다, 모든 소리들 입다물었다, 열두시.
너의 일생에 이처럼 고요한 헤어짐이 있었나 보라
자물쇠 소리를 내지 말아라
열어두자 이 고요 속에 우리의 헤어짐을.
한시
어디 돌이킬 수 없는 길 가는 청춘을 낭비할 만큼 부유한 자 있으리요
어디 이 청춘의 한 모퉁이를 종종걸음칠 만큼 가난한 자 있으리요
조용하다 이 모든 것은.
두시 두시
말해보라 무엇인가 무엇인가 되고 싶은 너를.
밤새 오는 눈, 그것을 맞는 길
그리고 등을 잡고 섰는 나
말해보라 무엇인가 새로 되고 싶은 너를.
이 헤어짐이 우리를 저 다른 바깥
저 단단한 떠남으로 만들지 않겠는가
단단함, 마음 끊어 끌어낸…
너에게는 떠나버릴 힘만을
나에게는 노래부를 힘만을
―시집 ‘황동규 시전집’(문학과 지성사)에서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언제쯤 이렇게 될 수 있을까. 얼마나 더 마음을 수그리고 수그려야 이별 앞에서 “너에게는 나를 떠나버릴 힘만을, 나에게는 그걸 노래 부를 힘만을” 기원할 수 있을까. 열한시…열두시…한시…두시…밤의 시간이 흐를수록 고요와 함께 들여다봐지는 심연이여. 그러나 “이 헤어짐이 우리를 저 다른 바깥 저 단단한 떠남으로 만들지 않겠는가”.
신경숙(작가)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