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경택 칼럼]물컵 미스터리

  • 입력 1999년 10월 8일 19시 29분


재계(財界)에는 찬바람이 불고 있다. 보광그룹에 이어 한진그룹도 탈세로 걸려 조중훈(趙重勳)그룹회장 등 삼부자(三父子)가 검찰에 고발되자 대기업들은 바짝 긴장하고 있다. 한진의 경우 추징금만 해도 5천수백억원에 이르고 이와는 별도로 벌금까지 물어야 할테니 결국 경영권이 조(趙)씨 일가의 손을 떠나는 게 아니냐, 다음에 손볼 기업은 어디라더라 하는 소문들이 꼬리를 물고 있다. 모두들 떨고 있다. 불안해 하고 있다. 정부는 비리척결엔 성역이 없다, 조세정의 확립과 재벌개혁은 흔들릴 수 없는 원칙이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사업하는 사람들은 말한다. 이처럼 세게 칼을 휘두르는기한이 언제까지 인지, 그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대체적인 밑그림이라도 있는 건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고 한다.

▼ 대우 다음 어느 그룹?

주식시장도 여전히 불안감에 싸여있다. 며칠 전 정부가 금융시장안정대책이라는 약을 쓴 직후인데도 심리적 지지선이던 종합주가지수 800선이 무너졌다. 바로 회복되기는 했으나 시장에 대한 불안감은 여전하다. 정부가 IMF위기도 벗어나고 경제성장률도 높아졌다고 하는데도 시장의 불안이 가시지않는 이유는 뭘까. 여러 요인이 있겠으나 한마디로 정부가 시장참여자들에게 믿음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우나 투신사 등에 대한 정부의 처리방침이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는 불신, 대우에 이어 어떤 그룹이 또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때문이다.

정치권은 아예 시계(視界) 제로 상태다. 정계에서는 총선이 반년 앞으로 다가왔고, 정치개혁이 어떤 개혁보다도 중요하다고 입버릇처럼들 얘기하지만 누구도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다.

신당은 언제 어떤 모양새로 모습을 드러낼지, 신당이 뜨면 ‘돈 안쓰는 정치’는 되는 건지, 여권은 합당을 하는 건지 아닌지, 급조된 정당의 이름을 내걸고 정당명부제를 할 수는 있는 건지, 선거구제는 중선거구제로 가는 건지 도무지 딱 부러지게 잡히는 게 없으니 정치지망생들은 여기 저기 기웃거리느라 바쁘다. 이런 분위기에서 어느 정치인이 새천년의 비전을 제시할 것이며 정치발전을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개발할 것으로 기대할 수 있겠는가.

‘개혁호’가 제대로 항해하려면 우선 곳곳에 낀 불안의 안개를 걷어내야 한다. 모든 것이 투명하여 앞을 내다볼 수 있어야 한다. 각 분야에서 예측이 가능해야 한다.

무엇보다 개혁을 외치는 권력핵심부터 도덕 불감증에서 깨어나야 한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모시는 국민회의 총재비서실장의 경우를 보자. 그의 부인의 보험수주실적이 정권교체 이후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급상승했는데도, 더구나 보험에 든 사람들이 재계 인사와 옷로비 사건때 등장했던 바로 그 고관부인들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간접상납행태’라는 비난의 소리가 쏟아지는데도 청와대와 국민회의측에서는 자성의 소리보다는 ‘개혁드라이브의 뒷다리를 잡으려는 특정세력의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며 예의 ‘반개혁음모론’을 들먹였다. 때맞춰 여권 일각에서 제기되던 총재비서실장의 당직사퇴론이 흐지부지 사라진 것은 물론이다.

권력의 중추기관인 국가정보원의 책임을 맡고 있는 사람이 고향을 방문하는 데 공군헬기를 이용한 게 말썽이 됐는데도 별 얘기가 없다. 공사(公私)구분을 못하는 이런 공직자는 이른바 글로벌스탠더드대로라면 사직하고 헬기이용 비용을 물어내는 게 마땅하다. 그러나 한국의 수준은 시치미 뚝 떼고 넘어가는 정도다.

▼ 누구 말이 진실인가

개혁은 자기 혁신에서부터 시작돼야 한다. 명확히 밝힐 것은 밝히고 책임 물을 것은 묻고 넘어가야 남에게 개혁을 요구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실세 장관으로 알려진 박지원(朴智元)문화관광부장관이 중앙일보사 사장실에서 깨뜨렸다는 ‘물컵의 비밀’도 확실히 밝혀져야 한다. 박장관이 행패를 부리느라 컵을 내팽개쳐 깨뜨렸다는 중앙일보의 주장과 실수로 떨어뜨렸다는 박장관의 해명은 완전히 상반된다. 사실 ‘물컵의 진실’에는 적어도 현 권력과 언론의 관계라는 대단히 상징적이고도 함축적인 의미가 담겨있지 않을까. ‘물컵의 진실’ 규명을 시작으로 이 정부의 언론접촉행태와 중앙일보의 보도태도 등에 대한 잘잘못이 낱낱이 독자 앞에 드러나야 한다.

어경택〈논설실장〉euh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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