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167)

  • 입력 1999년 7월 13일 18시 36분


엄마에게 멋진 레스토랑에 가서 저녁을 살 기회를 달라고 졸랐어. 바빠서 안된다는 엄마에게 초저녁 시간을 피해서 찾아갔지. 요즈음 결혼 시즌이라 한복집은 주말 저녁이 더 바쁘대. 역시 신부감과 그 어머니들로 가게는 눈코뜰새없이 붐볐어. 나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어. 아홉시가 넘으니까 신통하게도 썰물 빠지듯이 손님들이 사라지는 거야. 내가 엄마에게 우리의 약속을 환기시켜 드리니까 엄마두 싫지는 않은 기색이셨어. 나는 엄마를 이끌구 점 찍어 두었던 곳으로 갔어. 저녁 손님이 한 차례 빠져나간 다음이라 자리는 비교적 한산한 편이었어. 우리는 남산과 서울의 야경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모퉁이의 명당 자리 창가에 앉았어. 나는 언니가 학교를 사직했다는 데서부터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했지. 그리고 언니는 아마 대학원에 진학할 모양이라고.

그런데 참, 우리 엄마는 귀신이야. 전에두 그랬잖아. 우리가 자랄 적에 우리들 하구 하루 종일 함께 지내며 온갖 놀이두 같이 놀아 주고 밥두 같이 먹구 하시면서도 아버진 모르는 일이 많았지만, 엄마가 시장에서 돌아와 방안을 한바퀴 둘러보고 우리와 눈을 맞추기만 하면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걸 금방 알아 맞추곤 했잖아.

엄마는 내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듣기만 하더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또 기다리는 거야. 마치 그래서… 하면서 참을성 있게 대답을 재촉하는 듯한 눈빛으로. 나는 머뭇거리면서 차마 말을 못하고 망설이고 있었어. 엄마가 이러는 거야. 그래, 다 끝났니? 그 얘길 하려구 날 불러낸 것 같지는 않구나. 나는 얼결에 이렇게 말했어. 엄마, 언니가 결혼을 하겠대요. 엄마는 차분하게 되물었어. 그래, 잘됐구나. 어떤 젊은이냐? 나두 잘모르지만…시를 쓴대. 우리 엄마는 희미하게 웃으셨어. 그러곤 이러는 거야. 난 책벌레에게 데었는데. 시를 읽는다면 모를까 쓰는 일은 사는데 별로 도움이 안되거든. 요샌 머 그렇지두 않대요. 학교 선생님두 하구 출판사나 신문사나 머 직업은 많대요. 엄마는 역시 아버지의 아내였어. 고개를 흔들며 이렇게 말했어. 직장 걱정을 하는 게 아냐. 사회가 어려운 시절이 되면 시를 쓰는 사람은 못견디게 된다더라. 모든 책에는 사회가 이러이러해서는 안된다고 씌어 있거든. 그 틈에 나는 얼른 비집고 들어갔지. 사실은 언니 그 사람이 지금…감옥에 들어가 있대요. 엄마는 그때 아예 포크를 접시 위에 내려놓고 고개를 돌리더니 한참이나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어.

너 지난번에 윤희네 시골 갔다 왔지? 그땐 별일 없구 건강하다구 하더니…. 나는 그냥 고개를 숙이고 엄마의 끓어오른 감정이 숙어들기를 기다렸어. 그러자, 내 마음 속에서는 언니의 외로움과 고통이 생각났고 더욱 은결이의 잠든 얼굴이 생각나는 거야. 엄마, 힘드신 우리 엄마지만 우리의 아픔도 엄마 인생의 일부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엄마도 결국은 아버지를 그런 방식으로 선택했으니까. 나는 사실대로 전부 말하려고 작정해버렸지. 엄마, 언닌 그 사람과 아무도 몰래 결혼했어요. 반 년이나 같이 살았구요. 저한테 편질 했는데 서울로 올라오기루 했대요. 일단 거기까지만 말했어. 엄마가 두통이 난 사람처럼 두 손가락을 관자놀이에 갖다대고 식탁 위로 고개를 숙이고 계시잖아. 화장실에 다녀오신 엄마는 멀쩡했다구. 화장도 지워진 데가 없었다니까. 엄마는 그때부터 침묵이야.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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