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김방옥/연극이 죽어가는데…

  • 입력 1999년 4월 30일 19시 45분


초여름같은봄날, 차창밖으로 복사꽃 덮인 연분홍색 구릉들을 바라보며 황홀해 한다. 이제 나이를 먹을수록 켜를 더하는 계절의 순환들은 어떤 어지럼증 같아 그 터널 속을 거슬러 올라간 이삼십년 전의 젊은시절은 이미 아득한 전생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일주일의 수업을 마친 주말마다 두 세편의 연극을 보러 서울로 온다. 고속버스 천장에 매달린 비디오 모니터에서는 어디서 본듯한 화면들이 또 다른 프레임 속의 삶을 강요하고 있다.

계절의 바뀜이 엄연한 자연의 축복이지만 구조조정이니 퇴출이니 해서 적자생존의 싸움터 한복판에 있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 삶 속에는 이런 치열한 현실을 상쇄할 만큼의 어떤 도취나 마비나 어지럼증들이 있는 것도 사실인 듯하다.

그 옛날에는 어쩌다가 할머니가 들려주는 옛날 얘기 한 토막이 아이를 상상의 세계로 이끄는 끈이었을 것이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어쩌다가 읽은 소설 한권, 모처럼 본 영화 한편이 삭막한 현실의 오아시스가 되었으며 그 위에 삶의 한 진실을 비춰보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학자들의 어려운 글을 빌리지 않더라도, 사방에 현실 아닌 꿈이, 실제 아닌 허구가, 환상이, 이야기가, 이미지들이, 기호들이, 예술이라는 것들이 넘쳐난다.

많은 사람들이 하루 서너 시간 이상 텔레비전 화면 앞에 붙어있으며 두 세편의 드라마와 그 사이 사이 끼어드는 수십편의 현란한 광고에 노출되어 있다. 전국 방방곡곡 허름한 유리창에 똑같은 포스터를 붙인 비디오 가게들. 거기 흘러 넘치는 비디오 영화는 이제 일상의 소모품이 되어버렸다.

그것들은 우리 삶의 한 순간을 빛나게 해주기보다 오히려 삶을 망각하게 하고 소모시키며 무감각하게 만들기도 한다. 바쁜 척 돌아가지만 우리 모두가 스타 드라마 유행 광고라는 거울 앞에서 떠나지 못한다.

이제 ‘나’는 텅 비고 우리의 정체성은 어디서 본듯한 이동통신 광고나 멕 라이언이나 심은하가 나오는 어떤 영화나 드라마 장면들의 누덕누덕한 짜깁기로 대체된 것이 아닐까.

‘보고 또 보고’와 ‘청춘의 덫’이 동시에 끝나버린 요즘 우리들은 갑자기 배신당한 애인처럼 허무하다. 매일 저녁 우리를 찾아와주던 그들은 어떤 어둠속으로, 어떤 침묵속으로 사라져버린 것일까.

그나마 드라마는 현실과의 일정한 관계라도 지니고 있지만 앞으로 우리 자녀들은 현실인지 꿈인지 모르는 사이버 공간속의 가상현실로 흡수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논 밭 사이에 느닷없이 들어선 지방대학 주변에서 귀를 뚫고 머리를 염색한 젊은이들은 그들이 딛고 선 땅과는 별개의 꿈을 꾸고 있다. 창조성과 아이디어가 고부가가치를 생산한다는 용가리의 꿈, 신 지식인의 꿈일까.

불과 몇 년 사이에 전국적으로 여섯배로 숫자가 늘어난 연극영화과에서는 매년 가수를 탤런트를 모델을 개그맨을 꿈꾸는 졸업생들이 쏟아져나오겠지만 막상 원초적이며 싱싱하며 인간적인 꿈꾸기라고 할 수 있는 연극은 죽어가고 있다.

신기루는 늦은 봄에 나타나는 기상 현상이라고 한다. 창밖에 찬란히 펼쳐진 봄도 환각인듯 한데 연극을 가르치고 보러다니는 나의 삶과 무의식처럼 흐르는 버스안의 비디오 화면…. 과연 무엇이 현실이고 진짜이며 가치있는 것인지 꼬리를 무는 상념속에 다시 빠져든다.

김방옥(연극평론가·청주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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