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47)

  • 입력 1999년 2월 23일 19시 01분


나는 지금도 그날 아버지의 귀로가 생각됩니다. 어머니를 다시 시장에 보내고 이 사회에서는 아무도 자신의 장래를 믿어주지 않는 백주 대낮의 바쁘고 무심한 거리를 아버지는 걷고 있었습니다. 국기 하강식이라도 하면 온 거리가 일시에 얼어붙던 그 관청 많은 대로에서 아버지는 숨통이라도 열려고 하는 것처럼 외서점이나 고서점의 어두운 통로를 돌아다녔겠지요. 그리고 식민지의 청년이었던 그가 동경에서 만났던 고야의 화집을 같은 느낌으로 나를 위해서 샀을 거예요. 전쟁과 압제의 공포로 가득찬 신음 같은 흑백 형상들을.

내가 아버지의 과거로 들어가 볼 수 있었던 그 두 해의 우리들의 화해 기간에 대해서는 나중에 쓸 거예요. 내가 말했죠, 아버지의 병이 밝혀지고 임종할 때까지 나는 그이를 지켜 드렸다구요.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나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어려서는 아버지를 이해하려 하지 않았고 커서는 대학생이 되어서도 군사독재에 대하여 아무 것도 행동하지 않은 나의 자책이었을까. 나는 닥치는대로 그 방면의 책들만 읽었죠. 그런데 어느 날 당신이 나타난 거예요. 내가 처음으로 당신과 입을 맞추었던 날이 생각나요. 그래요, 그건 당신이 방과 작업실 공사를 끝냈던 그 해 봄날 주말께였을 거예요.

6

밤이 깊었다. 나는 윤희의 노트를 덮고 잠깐 드러누웠다. 시간이 정지된 것만 같았다. 그네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들은 대부분 내가 들어서 알고있던 것들이었다. 뒤에도 틈만 나면 윤희는 가족들의 이야기를 했다. 나는 윤희보다 더욱 아버지를 잘 표현해줄 수가 있었고 그건 마치 굵은 선만 남은 그림에 명암과 배경을 덧칠해 주는 것과도 같았다. 그러면 윤희는 소리없이 눈물을 흘렸다. 나는 곁에서 잠자코 그네의 격정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내가 조직에 관여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남수가 서울로 떠나던 해의 여름에 나는 어떤 모임에 초청을 받았다. 기독교 단체들이 현장 운동에 활발하게 개입하게 되었던 무렵이었는데 교역자나 일반인들을 막론하고 전국에서 현장과 밀접한 연결이 있는 이들을 모아서 사례도 주고 받고 협력도 다지는 그런 모임이었다. 청년운동이나 노동 현장 쪽의 사람들은 거의가 학생 출신이나 투옥 경험이 있던 활동가들이었다. 모임은 별게 아니었다. 이미 전국적으로 알려진 공개적인 사업의 사례를 발표하거나 시사적 흐름을 놓고 조별 토론을 벌이거나 일과 후에는 적당히 사람을 사귀는 자리였다.

내가 저녁을 먹고나서 건물 밖에 나와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한 사람이 다가왔다. 그는 키가 작고 얼굴이 네모지고 눈이 총명하게 반짝이는 내 또래의 청년이었다.

인사합시다. 저는 최동우라구 합니다.

오현우요.

아, 저는 오형을 잘 알구 있습니다.

어떻게….

시월 투쟁 때 감옥 갔죠. 유신반대 첫 번째 테이프를 끊지 않았어요? 나 박석준이 동창입니다.

그랬군요. 이거 반갑습니다. 지금 어디서 뭘하세요?

군대 갔다 와서 인천의 어느 공장에 들어가 있었어요. 곧 그만둘 작정이지만.

그렇게 나는 최동우와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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