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마이너 리그(54)

  • 입력 1998년 12월 20일 18시 43분


화적 ⑩

출발날짜까지는 열흘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비자를 내는 데만도 시간이 빠듯했다. 조국과 승주는 여기저기서 여행비를 빌려 모은다 반바지와 선글래스를 산다 하며 흥분된 나날을 보냈다. 브라질의 특산품이 뭐라는 둥 누구누구의 부탁으로 뭐만은 꼭 사와야 한다는 둥 떠들어대는 그들에게는 이번 여행이 비즈니스라고 아무리 일깨워줘봤자 소용없는 일이었다.

내가 알기로 헌팅, 즉 사전조사라고 하는 것은 놀고 먹는 게 아니었다. 쇼를 제대로 열 수 있는 환경이 되는지 알아보고 수지타산도 맞춰봐야 한다. 교민이 얼마나 되며 이 쇼에 얼마나 관심을 갖고 있는지 시장을 파악하는 일도 중요하다. 또 현지에서 장소와 무대장비를 임대하고 포스터와 티켓의 제작 배포를 맡아줄 사람도 물색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공연할 극장의 규모와 시설은 물론이고, 팀을 이끌고 오는 일이니만큼 숙박시설과 교통편도 자세히 알아두어야 한다.

바쁜 연예인들이 브라질까지 갈 때에는 개런티도 개런티지만 멋진 관광에 매력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관광을 위한 답사 역시 필요하긴 하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일인데도 조국과 승주는 주로 그것만을 염두에 두었다. 나머지 모든 것은 뻬뜨루 최가 알아서 할 거라고 태평이었다.

“뻬뜨루 최는 그냥 협찬이야. 기획사는 우리라구.”

내가 말하자 그들은 쌍둥이처럼 똑같이 ‘노 프라블렘!’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언제나 비관적이기 때문에 내 인생이 우중충한 거라고 나를 걱정해주는가 하면 빛나는 태양을 마음껏 가슴에 끌어안으라는 진지한 충고까지 해주었다.

비행기 표까지 보냈으니 나도 뻬뜨루 최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믿음이 갔다.

브라질 쪽의 일은 어떻게 해결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쪽 일 또한 큰 과제가 남아 있었다. 가장 중요한 텔레비전 방송에 아무선도 대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획대로라면 브라질 쇼는 텔레비전의 구정특집으로 방영되게 되어 있었다. 이민 30주년을 맞는 브라질 교민의 삶을 화면에 담고 고향산천에 대한 인사 몇 마디를 보탠 다음 쇼를 내보내는 것이었다. 텔레비전에 방영되지 않는다면 유명 연예인이 브라질까지 갈 리도 없고 뻬뜨루 최 역시 협찬을 할 이유가 없었다.

애초에 브라질 쇼를 기획한 것은 당연히 김태성 사장이었다. 방송사 간부들을 접대하는 자리에서 즉흥적으로 나온 아이디어였다. 추진해보라는 대답 역시 흔쾌하긴 했지만 술자리에서 오간 말이니만큼 ‘실세의 책임있는 발언’은 아니었다. 이 기획을 조국에게 맡기면서 사장 자신도 성사되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뻬뜨루 최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말이다. 상황은 가능한 쪽으로 변화했다. 그러나 조국은 사장에게 이 일을 추진해보라고 했다는 방송국 간부가 누군지조차 알지 못했다. 오로지 아마존 밀림으로 들어간 사장이 어느 하늘 밑에서인가 교신을 해오기만을 기다리는 형편이었다. 나는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를 읊을 기분조차 나지 않았다.

<글:은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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