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마이너 리그(19)

  • 입력 1998년 11월 10일 19시 05분


출분 ①

전시회는 성황을 이루었다. 전시물은 물론이고 화분과 물주전자, 방명록까지 모든 게 완벽하고 멋졌다. 해마다 있는 개교기념일 행사의 여덟 개나 되는 전시회 중의 하나일 뿐이었지만 우리 눈에는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물리선생의 편지도 인기의 요인이었다. 영문 편지 속에 왜 한글 편지가 끼어 있는지 궁금해서 다가갔던 구경꾼들은 유치한 구절마다 빨간펜으로 익살스럽게 토를 달아놓은 문구를 읽었다. 그런 다음 〈선생님 찬조작품〉이라는 제목에 궁금증을 품었던 몇몇에 의해 그 편지가 물리선생의 연서라는 밝혀지는 순간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그 사이로 승주와 조국은 들뜬 걸음을 바쁘게 옮겨놓곤 했다.

그러나 흥분은 체력 소모가 큰 것이라서 오래 지속될 수 없는 법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는 허망함 같은 걸 느꼈고 절여진 푸성귀처럼 시들해졌다. 구경꾼들도 점점 뜸해갔다. 점심시간이 지나자 조국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두환이가 왜 안 보이지?”

“자나보지 뭐.”

승주가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에게는 두환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하얀 승주의 얼굴은 창백했고 입술이 말라 있었다. 토요일이라서 수업도 일찍 끝났을 텐데 소희가 영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나대로 머릿속이 몹시 복잡했다. 오후 2시쯤 되자 행사는 막판으로 접어들었고 단축 마라톤이 시작되었다. 붓자국이나 얼룩 하나 없이 새파란 11월 하늘이었다. 그 아래 열일곱살에서 열아홉살까지의 남학생 천이백 명이 한 자리에 모여 뛸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다들 체육복이나 반바지 차림이었고 위는 런닝 아니면 티셔츠였다. 콧김도 씩씩하게 맨손체조를 하는가 하면 이런 걸 왜 하냐고 불평했으며, 또 누군가는 부신 해를 향해 히죽 웃었다. 시작하자마자 기권할 거라면서 운동화끈을 단단히 매는 아이도 있었고 안 보는 척하면서 남의 준비운동을 슬쩍슬쩍 본따 하는 아이도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시간은 흘러갔으며 하늘은 여일하고 무심했다. 햇살은 수없이 많은 어깨 위에서 귀찮다는 듯 천천히 일렁였다.

교장선생이 신호총을 쏘았다. 멀리서 보면 무리는 천천히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총소리를 듣자마자 많은 아이들은 자신이 그 총에서 발사된 총알이라도 되는 듯이 튕겨나갔다. 그들에게 떠밀려서 나는 앞으로 나아갔다. 학교 앞을 나서면 곧바로 언덕배기였다. 어깨를 부딪혀가며 좁은 교문을 통과해나왔을 때는 벌써 많은 아이들이 숨을 몰아쉬며 언덕을 넘어가고 있었다. 모두들 앞을 보고 달렸다. 맨 몸뚱이들이 서로 부딪쳤다. 대열 한가운데에서 나는 눈물이라도 솟을 것 같은 비애를 느꼈다. 아스팔트 4차선이 나타났다. 흰 모자를 쓰고 호루라기를 입에 문 선생들이 도로 군데군데에 서 있었다. 돼지수를 셀 때처럼 학생들의 팔뚝에 퍼런 도장을 찍어주기 위해서였다. 도장이 없으면 무효였다. 반환점에 닿자 확인도장을 받은 조국과 승주가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뛰는 척하다가 뒷길로 들어갔다. 조국의 집까지는 1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글:은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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