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스탠더드시대 30]영수증 문화

  • 입력 1998년 9월 15일 19시 26분


《강남대 세무학과 서희열(徐熙烈)교수가 2년 전 대만을 들렀을 때의 경험담. 상점에서 기념품을 사면서 받은 영수증에 일련번호가 찍혀있었다. 점원에게 물어보니 “일정 기간 후에 추첨해 당첨자에게 상금을 준다”는 대답이었다. “89년 부가가치세제를 도입한 대만은 영수증 주고받기를 정착시키기 위해 지금도 이같은 이벤트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영수증이 세금을 부과하는 가장 근본적인 자료이기 때문이죠.”(서교수) 미국은 ‘돈이 흐르는 곳에는 영수증이 따라다닌다’는 원칙이 확실히 지켜지는 나라중 하나. 어느 나라보다 엄격한 미국 국세청(IRC)은 개인 근로소득자를 무작위로 선정해 세무조사를 벌인다. 5년간 각종 거래사실을 입증하지 못하면 무거운 세금을 물린다. 이를 방어하기 위한 확실한 도구가 영수증. “미국인들은 모든 영수증을 5년간 보관한다는 사실에 놀랐다”는 것이 최근 미국에서 돌아온 조모씨(36)의 말.》

지난 92년 IRC는 미국 로스앤젤레스 한인사회의 계(契)조직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5년 가까이 조사를 벌였다. 이유는 영수증 등 입증자료가 따라붙지않는 자금흐름을 차단하겠다는 것.

“미국의 경우 거의 모든 거래가 신용카드와 수표(체크)로 이뤄져요. 이 때문에 은행과 세무당국에 포착되지 않는 거래는 거의 없는 셈이죠. 영수증은 이를 확인하는 징표일 뿐입니다. 선진국의 모범적인 영수증문화는 바로 이같은 투명한 거래에서 비롯되는 겁니다.”(원윤희·元允喜 서울시립대세무학과 교수)

우리나라의 현실은 어떤가. 고속도로 통행료를 치르는 톨게이트엔 언제나 ‘흰꽃’이 만발해있다. 통행료 영수증을 길에 버려둔 것이다. 영수증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우리의 영수증문화를 그대로 보여주고있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가짜 영수증을 국세청에 내밀고 세금을 떼먹는 연예인, 아무 말 없는 고객에겐 영수증을 끊어주지 않고 세금을 덜 내는 사업자들이 우리 주변에 수없이 많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이런 것을 고치기 위해 위해 다음달부터 대대적인 영수증 주고받기 운동을 벌일 준비에 바쁘다. 그러나 지난달 이 준비모임에 참석한 한국조세연구원의 현진권(玄鎭權)연구위원은 이들에게 다소 회의적인 의견을 던졌다. 영수증문화를 위한 기본 인프라가 안되어 있기 때문에 영수증 주고받기 운동을 벌이더라도 ‘분위기 조성’ 이상의 큰 효과는 없다는 지적이었다.

현위원은 ‘인프라의 큰 구멍’으로 세가지를 꼽는다. 전체 부가가치세 납세자의 57.5%에 이르는 과세특례와 간이과세자들이 하나고 부가세 면세사업자로 분류된 고소득전문직이 둘째이며 금융실명제 미비가 세째라는 지적.

과세특례제도가 얼마나 큰 구멍인지를 보자.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A씨. 연 매출액 4천8백만원(월평균 4백만원) 이하인 과세특례자로 분류돼있다. 식당 거래근거를 세무당국에 통보하거나 제출할 의무가 없다. 이 때문에 A씨가 음식재료 등을 B업체로부터 구입하더라도 세금계산서를 주고 받을 필요가 없다. 당연히 B업체도 세금계산서 없이 거래를 하다보니 매출누락은 손쉽다. 이른바 무자료거래의 온상이다.

“미국과 한국에서 모든 영수증을 모아 세무당국에 가져다 준다고 합시다. 미국에선 영수증을 근거로 90% 이상의 매출액을 확인할 수 있지만 우리는 이런 구멍 때문에 매출의 절반도 드러나지 않을 겁니다.”(강남대 서교수)

상황이 이렇다보니 한국의 영수증은 ‘거래의 증빙자료’라는 본연의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평가들이다. 게다가 △세금계산서 △금전등록기영수증 △신용카드매출전표 △구 간이세금계산서(영수증) △입장권 등 다양한 영수증이 나도는 것도 문제다.

그중 과세특례자가 남발하는 구 간이세금계산서가 영수증 세계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한 요인이 되고 있다. 이 영수증은 실제 거래를 했는지 보장하지 못하므로 국세청에선 거래입증자료로 인정하지 않는다. 이 영수증은 전체 영수증의 10%나 차지하고 있다. 일각에선 공인영수증을 공급하자는 대안을 내놓기도 하지만 당국에선 비용문제를 들어 난색을 표하고 있다.

조세전문가들은 “영수증문화를 정착시키고 투명한 과세를 앞당기기 위해선 과세특례자와 간이과세자를 일반과세자로 돌리는 것이 급선무”라고 입을 모은다. 그러나 올해 정부의 세제개편안에서도 이는 채택되지 않고 중장기과제로 넘겨졌다. 이는 과세특례자의 저항을 우려해 정치적인 결정을 내린 결과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제도적으로 큰 효과를 내지 못하더라도 영수증 주고받기 운동은 시작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많이 나온다.

“영수증 주고받기를 소홀히 하는 일반 소비자들도 탈세를 조장한 공범입니다. 일반 시민들이 영수증을 제대로 받는다면 해당 점포나 기업의 매출액이 일정 부분 노출돼 영수증 조작을 통한 탈세를 막는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는거죠.”(문광승·文光承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산하 경제정의연구소 사무국장)

서희열교수는 “영수증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한 인센티브가 있어야 한다”면서 “영수증을 모아올 경우 일정금액의 소득 공제 혜택을 주는 방안도 있다”고 말했다.

〈박현진기자〉witnes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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