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구름모자 벗기 게임(47)

  • 입력 1998년 9월 10일 19시 29분


제 2장 달의 잠행(23)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는 절대로 상상할 수 없는 종류의 일이 있다. 그 일은 나에게 그런 일이었다. 남편이 아닌 남자와 육체적 관계를 가진다는 것. 그 일이 어떻게 시작될 것이며, 어떻게 옷을 벗고 어떻게 전개되고 그리고 마지막에 휴지는 어떻게 처리될 것인가까지…. 그러나 이 생은 그 모든 것을 태연하게 꿀꺽 삼킨다. 혼돈과 불안과 죄책감과 두려움과 흔적과 그토록 선명하고 충격적이던 생경한 육체의 감각까지도. 처음에 나는 나 자신에게가 아니라 오히려 생의 태연함에, 육체의 포용력에 조용히 경악했다. 그리고 한 생경한 육체가 어떻게 한 여자의 잠든 정신을 깨우는지도….

이틀이 지난 뒤 점심 시간에 규를 만났다. 우리는 작은 해수욕장을 지나 해안도로의 끝에 있는 좁다랗고 새하얀 2층 목조 건물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었다. 그는 바닷가재 요리를 풀 코스로 시켰다. 나이 든 웨이터는 그를 잘 아는 모양이었다. 그는 요리될 바닷가재의 상태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 뒤 나에게 실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나는 손등이 덮히는 옷을 입고 있었다. 음식을 먹을 때 소매가 걸리자 그는 나의 소매를 위로 걷어올려 주었다. 여름 천인데다 소매의 폭이 넓어 쉽지가 않았지만 그는 얼굴을 숙인 채 꼼꼼한 손길로 팔목이 드러나도록 올려주었다. 그 사소한 보살핌 때문에 내 마음은 순식간에 연약해졌다. 훌륭한 성인 여자들이라면 여자들을 아이같이 취급하는 그런 얄팍한 보살핌을 비웃을 수도 있을 것이었다. 한때는 나도 그랬었으니까. 그러나 나는 마음이 연약해진 나머지 숟가락질을 잠시 멈추어야만 했다. 모든 것이 날씨 탓일 것이다. 나쁜 날씨, 내 인생은 나쁜 날씨속에 오래도록 방치되어 있었다.

―흔히들 더 선량하고 너그러운 사람들이 더 많은 사랑을 한다고 착각을 하지만, 실은 정말로 사랑에 빠지고 사랑을 끝까지 하는 자들은 나쁜 사람들이지. 보다 덜 선량하고, 부도덕하고, 연약하고 이기적이고 히스테릭하고 예민하고 제멋대로이고 불행하고 어둡고 게으르고 자기도취적이고 집요하면서도 변덕스럽고 독선적이고 강하고 질투하는 사람.

―…지금의 나 같은 사람이군요.

자백이라도 하는 기분이었다. 그는 공감한다는 듯이 끄덕였다.

―상처 받은 사람의 모습이기도 하지.

그는 나를 너무나 잘 안다는 듯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문제 삼아 비난하는 것도 아니고 감탄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나라는 인간이 그런 유형이라는 말일 뿐이었다. 어차피 그는 나를 사랑하거나 자신의 인생과 결부시킬 의사 같은 건 없으므로. 나는 처음으로 마주앉은 남자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담담한 눈빛, 얄팍한 입술, 얼굴을 조금은 정감있어 보이게 만드는 단정한 코, 게임을 하는 육체와는 전혀 상관 없어 보이는 무욕의 표정. 언젠가 나를 괴롭히게 될 얼굴이라는 것을 이내 알 수 있는, 흡사 나의 심상 속에서 빠져나온 것 같은 하나의 얼굴.

해수욕장 주변에는 텐트를 친 사람들이 카레를 끓여 점심을 만들거나 낮잠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얼굴이 검붉은 나이 든 시골 남자들이 비치 파라솔 아래서 소주와 파전을 먹고 있었다. 바다 속에는 햇볕에 그을은 어촌 마을의 아이들 넷이 담요처럼 넓은 검정색 튜브를 타고 떠 있었다. 바다는 파도도 없이 풀밭처럼 고요했다. 한여름의 건조하고 새하얀 햇볕 속에서는 누구나 영혼이 해리 되어 보였다. 길이나 나무나 집들조차도. 그리고 그도 나도.

<글:전경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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