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구름모자 벗기 게임(34)

  • 입력 1998년 8월 26일 19시 29분


제2장 달의 잠행 ⑩

남자는 마치 서른세 살 먹은 여자는 난생 처음 본다는 듯한 눈빛으로 나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나는 서른 아홉 살이고 이름은 규입니다.

―그 손등의 상처……

―말보로예요.

그가 손등을 위로 펴고 세 개의 담뱃불로 지진 자국을 힐긋 보았다.

―고문이라도 당했어요?

―사실 청춘은 고문이죠. 나도 네놈들만큼 독하고 강하다는 표지. 남자 애들은 얼굴이나 손이나 피부가 곱게 생긴 녀석들을 우습게 알죠. 녀석들 앞에서 손등을 지진 후부터는 아무도 더 이상 건드리지 않았어요. 뭐 그런 거죠. 이 일로 두 달이 흐르자 나도 모르게 무림파의 실세가 돼 있더군요.

―무림?

―남자애들 학급엔 그런게 있어요. 공부만 잘하면 학림, 반장 부반장이면 관학, 싸움을 잘하면 무림이죠. 그리고 대다수의 평민들……그 속에서 현실 정치나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은 다 일어나요. 축소된 세상이죠.

―무림파 애들은 자라서 뭐가 되죠? 건달? 깡패? 브로커? 연예계 매니저?

―자라서 기자가 되죠. 그리고 사는 게 너무 시시해서 돈 많은 이혼녀와 결혼하고 시골의 우체국장이 되는 거예요.

그의 표정은 여전히 무심했다. 나는 오랜만에 소리를 내어 웃었다.

우리는 점심을 먹고 수를 데리러 학교에 갔다. 수를 마을의 친구 집에 내려놓은 뒤 나의 차문이 고쳐질 때까지 시간을 보내기 위해 한갓진 어촌의 한 슈퍼에서 지렁이 상자를 사들고 샀다. 공중에서 유리조각이 깨어져 내리는 듯한 투명한 햇빛 아래 이제 막 씻어 건진 듯 선연한 주홍색과 청색의 슬레이트 지붕들, 풀 먹인 이불잇처럼 새하얗고 적막한 마을 앞길들……

가지런한 빗처럼 나뭇잎들을 쓸고가는 바람, 스러져가는 듯 낮은 집들의 담 밑에 피어 있는 소박하고 화려한 맨드라미꽃들……나는 차창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입을 커다랗게 벌렸다. 푸른 벨벳같은 콩밭이 흰 속잎을 드러내며 바람에 뒤집히고 바다엔 순은빛 물 비늘이 숭숭 튀어 올랐다.

우리가 자리를 잡은 곳은 어촌 마을의 끝 널따란 공터를 낀 산기슭의 바닷가였다. 한때는 멸치막이었던 것 같은 널따란 공터엔 엉겅퀴, 토끼풀, 오이풀, 굉이밥풀, 덩굴풀 같은 여름풀들이 뒤엉켜 자라고 있었고 목조 창고 세 채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띄엄띄엄 서 있었다. 바닷가를 따라 플라타너스 나무들이 서 있어서 그늘 아래 낚싯대를 드리울 수 있었다. 바닷바람이 유난히 그 곳으로만 불어와 무성한 플라타너스 잎이 쏴쏴 소리를 내었다.

나는 물고기를 공중 높이 들어올릴 때마다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물고기가 바늘을 깊숙이 물어 찌를 흔들 때 낚싯대를 재빠르게 걷어올리면, 내 몸 깊은 곳이 물고기의 아가미에 와드득 물어뜯기는 듯, 혈관 속에 소스라치는 진동이 일어났다. 내가 비명을 지를 때면 그는 긴장된 얼굴로 나를 빤히 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물고기의 아가미를 열어 바늘을 뽑아냈다.

바늘을 너무 깊이 삼켰을 때는 천을 찢을 때처럼 물고기의 살이 튿어지는 소리가 났다. 나는 얼굴을 찌푸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기분이 이상해요.

―물고기 한 마리가 바늘을 물 때 전 우주는 함께 진동을 하죠.

―물고기가 이렇게 요동치면, 바늘이 물고기의 살을 더욱 헤집겠죠.

―이게 내상의 표정이죠. 어때요? 당신과 닮은 것 같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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