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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1998년 8월 20일 19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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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아래 수몰 마을엔 새 한 마리 날아오르지 않았다. 어쩌면 개미 한 마리도 남아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보상이 끝나고 이주도 끝나 이제 물속에 잠길 일만 남은 마을.
―도시의 골동품상들이 저런 마을을 뒤지고 다니죠. 여기도 트럭을 몰고 자주 와요. 소방울, 여물통, 오래된 인두나 다리미, 낡은 궤짝과 가구들, 뭐든지 뜯어가죠. 문짝까지도요.
마을이 물에 잠기기 전에 한번쯤 꼭 가보고 싶었다. 그러나 혼자 갈 용기는 좀처럼 생기지 않았다. 계곡을 나와 코스모스가 무성하게 자라는 시골길을 달리다가 온천 마을을 지나자 분교 중학교가 나타나고 곧 길가의 우체국이 지나갔다. 국도로 접어들기 전의 단층 상점 거리였다. 그곳에는 농협과 닷새마다 장이 서는 작은 장터와 약국과 문방구와 노래방과 비디오방 미장원과 정육점과 식당 같은 허름한 상점들이 있는데 한여름 낮에는 상점 주인들조차 문을 걸어놓고 밭을 매러 가버리는 시골 거리였다.
우체국은 담장 대신 낮은 사철나무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었다. 꼭 닫혀 있는 우체국 문 양쪽엔 흰색 나리꽃 무덤이 줄기가 휘어지도록 가득히 피었다. 마당엔 빨간 우체통을 뒤에 매단 오토바이가 한 대 서 있었고 낮은 게양대엔 세 개의 깃발이 바람 한 점 없는 공중에 권태롭게 매달려 있었다. 사철나무 울타리 사이에 간간이 노란색 여름 장미꽃이 피어 있고 건물 머리엔 체신청 로고가 그려져 있는 평범하고 조용한 시골의 우체국이었다.
―어릴 때, 우체국 앞집에 산 적이 있었어요. 제 어릴 때 꿈은 우체국에서 일하는 거였죠. 그때 우체국은…. 어린 소녀였던 나에겐 로맨틱한 곳이었거든요.
나는 생긋 웃는다. 낯선 사람을 향해 그만큼이라도 웃는 것은 나로선 흔치 않는 일이었다. 게다가 어릴 때 꿈 이야기까지 하다니.
―그런 쉬운 꿈도 이루지 못했나요?
―어쩌면 너무 쉬워서 깜박 잊고 살았던 건지도 모르죠. 그래요, 잊었어요. 그러다가 세월이 흘러 이렇게 나이 든 뒤에 갑자기 생각이 난 거죠.
남자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골 우체국에서 일하는 건 쉽죠. 조금 권태롭지만…. 내려서 기름을 사세요. 나는 저기 농협에 들어갔다가 나올테니까.
남자는 우체국에서 조금 떨어진 구멍가게 앞에 차를 세우고 내가 내리자 무표정한 얼굴로 한번 뒤돌아 본 뒤에 떠났다. 구멍가게 곁은 여염집 마당 같은데 그 담벼락에 검은 글자로 ‘경유 등유 대행’이라고 쓰여 있었다. 현관문을 두드리자 얼굴에 주근깨가 많이 난 여자가 반바지에 슬리퍼를 끌고 나왔다. 마음이 좋게 생긴 여자에게서, 기름 한 통을 사고 주입기도 빌렸다. 길가에 서 있어도 남자가 오지 않기에 나는 길가에 세워진 자판기에 동전을 넣고 커피를 뽑아 마셨다. 커피 맛은 뜨겁고 달콤하고 걸쭉했다. 남자가 기름을 넣은 뒤 키를 넣고 돌리니 시동이 걸렸다. 라디오에서 ‘더스트 인 더 윈드’가 울려나왔다. 생의 모든 것이 언덕 아래로 미끄러져 내리는 듯 가파른 간주가 나와 남자 사이를 가르고 지나갔다.
―마음을 다른 데 뺏기고 사나 봅니다.
남자가 허리를 굽혀 차안에 앉은 내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한심해 하는 빈정거림이 아닌 염려의 눈빛이었다. 얼굴이 달아올랐다. 나는 눈을 돌리고 공연히 흘러나오는 노래의 볼륨을 높였다.
―괜찮으세요?
남자는 내게서 무언가를 느낀 것 같았다. 내가 어딘가 아프다는 것을…. 내 속에 고인 피가 나를 잔뜩 누르고 있다는 것을.
<글:전경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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