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납치 美비밀문건 첫공개…美『中情소행-朴대통령승인』

  • 입력 1998년 6월 9일 19시 24분


미국은 73년 김대중(金大中)납치사건이 이후락(李厚洛)전중앙정보부장의 지시에 의한 정보부원들의 소행이며 박정희(朴正熙)전대통령이 승인했을 개연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었음이 8일 확인됐다.

동아일보사가 이날 입수한 2백70쪽 분량의 당시 주한 미대사관의 비밀전문들에 따르면 필립 하비브 당시 대사는 납치사건이 명확히 이전부장의 지시아래 이뤄졌으며 박전대통령이 명시적 또는 묵시적으로 계획을 승인한 것으로 보인다고 국무장관에게 보고한 것으로 드러났다.

미국은 또 납치사건이 발생하자 당시 이상호 중앙정보부 미국지부장의 강제소환과 워싱턴에서 미 중앙정보국(CIA)과의 연락업무를 맡은 요원 한사람을 제외한 모든 정보부요원들의 철수를 한국 정부에 요구, 관철시킨 것으로 확인됐다.

하비브대사는 8월8일 김씨가 도쿄(東京) 팔레스 호텔에서 납치되자마자 청와대 중앙정보부 총리실과 접촉, 김씨의 소재 파악에 나서는 등 한국정부를 압박했으며 8월10일부터는 한국 정보기관의 소행이라는 단서를 잡은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박전대통령은 8월24일 청와대를 예방한 레스터 울프 미 상원의원에게 “납치사건이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는 김씨의 자작극일지 모른다”면서 자신은 사건과 무관하다고 주장했으나 김씨를 동교동 자택에 연금하게 한 사실은 인정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러한 내용을 담은 전문들은 최근 비밀이 해제됐으며 조지워싱턴대 국가안보 기록보관소의 로버트 왐플러 박사가 국무부로부터 건네받아 이날 김대통령의 워싱턴 방문에 맞춰 공개했다.

김대중납치사건에 대한 미국측 기록이 공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물론 피해자인 김대통령은 일본에서 납치돼 용금호에 강제로 태워진뒤 공해상에서 수장될 위기에 처했으나 CIA가 개입해 비행기가 출현함으로써 목숨을 건졌다고 증언, CIA의 관련여부도 외교채널에서 이뤄진 미국의 움직임과 함께 사건을 파악하는 주요한 단서다.

그러나 CIA의 비밀문서는 아직 해제되지 않았으며 당분간 해제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국무부의 비밀전문이 현재로서는 미국의 역할을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문건인 셈이다.

비밀전문의 내용을 몇가지 항목으로 나눠 정리한다.

▼주요 전문 요약

―8월8일〓도쿄로부터 김씨 납시사건을 보고받자마자 우리는 청와대와 중앙정보부 총리실과 접촉했다. 청와대는 한국정부는 김씨의 납치사건에 대해 아는 바 없다고 통보했으며 한국정부가 이 사건과 관련되지 않았다는 부인성명을 준비하고 있다.

―8월9일〓김정렴(金正濂) 청와대비서실장과 전화통화한 결과 김실장은 한국정부가 무관하다는 사실을 되풀이했다. 나는 이번 사건과 관련해 한국 정부가 수집한 모든 정보를 우리측에 알려줄 것을 요구했고 그렇게 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8월10일〓한국언론의 김씨 사건에 대한 보도가 한국 정부에 의해 통제되고 지시받고 있는 게 분명하다. 우리는 비공식 접촉결과 이 사건이 한국정보기관의 소행이라는 결론으로 향하고 있다.

―8월13일〓한국 언론은 보도하기 전 검열기관에 기사를 제출해야 한다는 사실을 한 언론인으로부터 전해들었다.

―8월14일〓김씨의 갑작스런 출현과 납치과정에 대한 설명은 한국에 큰 충격을 던져주고 있다. 우리 대사관은 처음에 매우 놀랐지만 지금은 그가 살아있다는 데 안도하고 있다. 김씨의 납치와 강제귀환은 중앙정보부가 개입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라는 확신이 퍼져가고 있다.

▼하비브 대사가 사건발생 두달쯤 뒤인 73년10월10일 국무장관에게 보낸 사건의 개관 요약

―사건 현황〓한국정부는 아직도 관련을 부인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지시아래 납치가 행해졌으며 박정희대통령도 명시적 또는 묵시적으로 승인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한국 수사기관이 수사를 한다고 말은 하고 있지만 아직 진정한 수사는 벌이지 않고 있다. 청와대에서 정치적 결정을 내리지 않는 한 수사의 진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김종필(金鍾泌)총리의 역할〓김총리는 이 사건이 일본과의 관계에 미치는 악영향을 깊이 우려하고 있으며 상황을 호전시키기 위해 타협을 모색하고 있다. 박대통령은 김씨의 조기 석방을 고려하고 있지 않지만 김총리는 일본언론과 야당의 비판으로 수세에 몰려있는 일본 총리를 돕기 위해 대안을 찾고 있다. 이같은 김총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국정부의 기본입장은 강경노선이다. 이 노선을 주도하고 있는 것은 이후락부장이며 박대통령의 심기를 반영하고 있다.

▼레스터 울프 상원의원의 박대통령 면담결과 요약〓8월24일 울프 상원의원은 박대통령을 만나 이번 사건에 많은 주의를 기울여줄 것을 요청하면서 박대통령의 코멘트를 구했다. 박대통령은 “수사가 진행중이기 때문에 상세한 언급은 하고 싶지 않다”면서 “북한 공작원의 소행이거나 일부 한국정부기관의 개입 또는 자신을 부각시키려는 김대중씨의 자작극일 수 있다”고 말했다는 것.

〈워싱턴〓홍은택특파원〉euntack@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