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봉순이 언니(8)

  • 입력 1998년 5월 8일 07시 28분


―그러게 말이다, 그래서 고아원에 맡겨졌는데 애가 힘은 세고 일은 억척스레 하니까 그 고아원 원장인지가 저번 있었던 집사네 집에 보낸 모냥이라, 밥만 먹이고 일시키라고.

―그런데 게서 보리쌀도 못 얻어먹고 매만 맞았다믄서.

양말을 깁던 이모는 혀를 끌끌 찼다. 이모가 맞장구를 치는 품이 처음 듣는 이야기가 아닌데도 두 자매는 싫증이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무튼 세상 사는 게 말이야. 없는 사람이 없는 사람 심정 아는 거지. 있는 사람들이 무섭다니까.

돌아오는 길은 캄캄했고 멀었다. 이모네 집은 새로 조성되는 모래내 마을 맨 끝에 있었다. 거기서부터 십분쯤 걸으면 모래내 개천 둑, 우리는 그리로 돌아나와 모래내 시장 입구 종점까지 걸어가야 했다. 검은 하늘아래 모래내 개천 둑이 수평선처럼 시커멓게 펼쳐져 있었다. 얼마 전에 내린 비 때문인지 진흙탕에 발이 푹푹 빠져 내 꽃고무신 위로 흙의 감촉이 선명했다. 초여름이었을까, 벌판처럼 펼쳐진 논에서 개구리들이 울고 있었다.

―엄마, 봉순이 언니는 우리 식구 아냐?

밤이 이슥해서 걸음을 서두르는 어머니에게 끌려가듯 걷다가 내가 물었다.

―아니긴, 우리 식구지.

―그런데 어디에서 어디로 도망친 거야?

그래도 친정붙이 집에 온다고 가지색 낡은 비로드 한복을 꺼내 입은 어머니는 나를 보고 빙긋 웃더니,

―아무 일도 아니야. 봉순이는 우리 식구야. 짱아, 저기 별들 참 곱지?

하고 말했다. 나는 봉순이 언니 일은 금세 잊어버리고 어머니를 따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들이 무리지어 빛나고 있었다. 동네에 가위를 울리며 다니는 엿장수 아저씨가 집어주는 강냉이처럼 하얗고 동그란 별들. 멀리 둑 아래 점점이 무허가 판잣집에서 나오는 호롱불들도 보였다. 어머니는 어느새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옛날에 금잔디 동산에 메기, 같이 앉아서 놀던 곳… 초등학교 여선생을 하다가 열네살 때 냉천동 집앞에서 만나 팔년을 연애한 아버지와 결혼한 어머니. 오빠의 이름은 항렬 때문에 그럴 수 없었지만 언니와 나의 이름은 소설의 주인공을 따서 지었다는 어머니는 새로 나온 소설은 빠짐없이 대본소에서 빌려다가 읽는 문학소녀였다.

그러는 사이 우리 집에 돌연한 변화가 생겨났다. 아버지가 돌아오신 것이었다. 나는 아버지에 대한 첫기억을 부산함으로 기억한다. 고모들이 신문지에 돼지고기를 싸가지고 집으로 오고 가마솥 뚜껑이 뒤집어진 채로 연탄화덕에 걸렸다. 녹두전이 부쳐지면서 돼지 비계가 녹는 냄새가 집안에 가득했고, 가을이면 주인집에 끌려와 이듬해 여름이면 어김없이 주인의 식탁에 오르곤 했던 주인집의 누렁이가 미친 듯한 허기로 짖어댔다. 봉순이 언니는 어머니와 고모들에게 쫓기듯, 나를 등에 업고 파를 사오고 두부를 사오고 부산을 떨었다.

<글:공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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