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밀레니엄]2027년 소설가 구보씨의 하루

  • 입력 1998년 4월 1일 20시 05분


사각 사각 사각… 부드러운 옷자락이 이슬 젖은 대나무밭을 지나가는 것 같은 소리에 소설가 구보씨는 서서히 단잠에서 깨어났다. 꿈의 끝자락은, 그러므로, 대나무 가는 가지를 부여잡고 수줍게 미소짓는 미녀의 모습과 오버랩되어 있었다.

정신이 맑아오기 시작하자 구보씨는 눈을 감은 채 씁쓸히 미소지었다. 세상이, 기술이 아무리 바뀌어도 사람 마음은 그리 쉽게 바뀌지 않는가 보다. 이제 나이도 되었으니 빨리 결혼하라고 때로는 지겹게, 때로는 애틋하게 호소하는 어머니는 가끔 이런 간접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뜻을 새삼스럽게 전달하곤 했다. 그럴때마다 구보씨는 “내가 무슨 수로 처자식을 먹여살릴 수 있겠어요” 하고 어물쩍 넘어가곤 했다.

남자가 돈을 벌어 처자식을 먹여살려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없어지고 남자들보다 돈 잘 벌고 사회활동 잘 하는 여자가 많고 많은 이 세상에서 그 말은 사실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결혼하라’는 시대착오적인 집요함과 마찬가지로 어떤 부분에서는 비합리적인 그의 어머니는 그가 그렇게 말하면 그를 심하게 채근하지 못하고 어물쩍 넘어가곤 했다. 그는 안봐도 알 것 같았다. 눈을 뜨면 그의 머리맡에는 ‘결혼해 주세요’하는 표정을 지은 홀로그램 미녀가 서 있을 것이다. 그는 눈을 감은 채 머리맡을 더듬어 입체 멀티미디어 자명종을 꺼버린 다음에야 일어났다.

2000년생, 만 스물일곱. 신혼을 채 벗어나지도 못했을 때 아버지를 여의고 장사를 해 집안을 꾸려온 어머니는 이 외아들에 대한 기대가, 소망이 남달랐다. 외아들이 ‘소설가’라는 직함을 택할 때 어머니는 아들의 직업이 잘 나가는 멀티미디어 시나리오 작가인 줄만 알고 기쁨과 자랑에 들떠 있었다. 아들이 택한 것이 이미 거의 멸종해버린, 진짜 문자‘만’ 읽는 사람들을 위한 소설이라는 것을 알고 어머니는 낙망했다.

그는 슬그머니 일어나 화장실로 가려고 하다가 문득 마루에 눈이 갔다. 어머니가 등을 보이고 컴퓨터 앞에 앉아 계셨다. 사이버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전자 상거래라는 것이 완전히 정착된지도 10여년이 흘렀다.

어머니가 하시는 장사는 ‘사이버 마트’ 한편의 구멍가게였다. 잘 나가는 장사꾼들은 통신망에서 값비싼 정보를 팔고 인기있는 프로그램들을 팔지만 어머니는 중고 컴퓨터 부품 같은 것을 사고 파는 장사밖에 할 수 없다.

화장실에 갔다가 옷을 챙겨 입고 소리내지 않고 슬그머니 나가려고 할 때 장사에 몰입해서 아무 것도 못 듣는 것 같았던 어머니가 한 마디 던지셨다.

“네 크레디트 카드에 조금 넣어놨다. 나가서 친구라도 만나렴.”

사실 결혼을 못할 것도 없다고 그는 잘 가는 사이버 카페에서 벗과 마주 앉아 생각했다. 그가 결혼을 못하는 것은 어떤 경제적 부담 때문이기보다는 ‘나같은 사람이 할 것이 못된다’는 주제파악 때문이었다.

결혼 같이 번거로운 절차를 밟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결혼을 안해도 성과 사랑, 가정생활 비슷한 것을 누릴 수 있었다. 스스로와 상대의 자유 의사를 존중하는 동거가 사회 생활의 기본적인 단위였다.

실제 상대가 없는 사람들은 사이버 스페이스에서 가정을 꾸릴 수도 있었다.

자기 말을 잘 듣는 이상적인 남편이나 아내, 속썩이지 않는 아이들을 사이버 스페이스에서 키우는 게임은 이미 생활의 일부분으로 자리잡은 지 오래다.

그런데도 결혼을 하는 사람들은 대개가 옛 풍습을 존중하는 사회 상류층들이었다. 어찌 구보씨가 결혼 같은 ‘사치’를 누릴 수 있겠는가. 이 생각을 하다가 구보씨는 자신이 벗의 말을 거의 듣고 있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내 동생은 사이버 스페이스에서 미국 시민으로 등록했다더군. 자기한테 한국이나 미국 같은 국적은 별 의미가 없지만 최신 기술을 구하거나 사업을 할 때 ‘한국인입니다’하는 것보다 ‘미국인입니다’하는 게 편리하다는 거야. 이제 저도 성인인데 집안에서 뭐라고 할 수 있겠나.”

영어와 한국어를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어렸을 때부터 교육받은 아이들, 미국이나 일본 문화에 이질감을 느끼지 못하고 자라온 아이들에게 국적은 예전같이 큰 의미를 가지지 않았다. 중산층 이상의 성인 중 열에 서넛은 미국이나 일본국적으로 등록하곤 했다. 유럽이나 동남아 등지에서 한국 국적으로 이적하는 사람들 때문에 인구는 얼추 맞춰졌지만, 거리에서, 사이버 스페이스에서 얼굴이 희거나 까만 ‘한국인’을 만날 때 여전히 이질감을 느끼는 구보씨였다. 아마 이것도 시대착오적인 감정이리라 하고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자정 뉴스 시간이 다 되어서야 집에 들어왔다. 한 벽을 온통 차지하는 대형 화면에서 아나운서가 떠들어대고 있었다. 어머니가 그를 돌아보고 말씀하셨다.

“사이버 스페이스에 들오는 게 영구 금지된 해커 하나가, 다시 사이버 스페이스에 들어온 흔적이 발견됐다는 구나. 예전 식으로 말하면 ‘탈옥’을 한 셈이지. 걱정이다. 우리 가게는 보안 장치도 허술한데.”

“다른 뉴스는요?”

“머리에 직접 넣을 수 있는 보조두뇌가 나왔대. 이 보조두뇌를 단 사람끼리는 서로 허락을 받으면 상대방 감정이나 생각을 완전히 자기 속처럼 알 수 있다는구나. 만약 네가 그걸 달고 소설 줄거리를 생각만 하면 상대방한테 그게 전달되는 거지. 지금은 한 사람 대 한 사람밖에 안된다지만 한 사람이 여러 사람하고 생각을 공유하는 것도 금방 가능해질 거야. 그러니까… 이렇게 세상이 변해가는데 힘들게 글로 소설 쓸 필요 있겠니?”

그는 아무 대답도 못하고 자기 방으로 들어왔다. 어쩌면 그는 그의 어머니보다도 구세대인 인물이었다.

기술이 너무도 빨리 사람들을 바꾸어놓는 이 세계에서 그래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으리라 믿고 발버둥치는 일은 너무도 힘겹고 참담했다.

그는 항복하고 싶었다. 내일은 사람을 고용하는 벤처 기업이 있나 검색해 볼까, 어머니가 곱게 키워놓으셨다는 ‘사이버 며느리’라도 만나 어머니를 흡족하게 해드릴까… 그 ‘내일’이 될 수 있으면 늦게 다가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서서히 잠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과학자-작가 약력]

▼ 과학자 이광형 ▼

△54년 전북 정읍 출생 △78년 서울대 졸 △85년 프랑스 응용과학원 전산학 박사 △현 한국과학기술원(KAIST)전산학과 교수 △저서 ‘퍼지이론 및 응용1,2권’ ‘달팽이와 TGV’ ‘멀티미디어에서 사이버스페이스까지’ 등

▼ 작가 송경아 ▼

△71년 서울 출생 △94년 연세대 전산과학과(현 컴퓨터과학과)졸 △94년 계간 ‘상상’에 소설로 데뷔 △창작집 ‘책’ ‘성교가 두 인간의 관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문학적 고찰’ 장편 ‘아기찾기’ 등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