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배순훈 정보통신부장관 『기업 정보화 힘쓸 때』

  • 입력 1998년 3월 30일 08시 40분


희끗희끗한 더벅머리에 검은테 안경. TV 광고모델로 나온 깔끔한 ‘탱크박사’의 인상보다 순박한 시골 아저씨에 가까운 모습이다.

대우그룹 프랑스 본사 사장으로 일하다 하루아침에 새 정부의 정보통신부장관으로 발탁된 배순훈(裵洵勳·55)씨. 오랜만에 등장한 민간기업인 출신 장관이어서 ‘신선하다’는 평가와 함께 남다른 기대가 쏠려있다.

그의 하루 일과는 국정에 대한 적응과 업무파악 일정으로 꽉차있다. 국무회의에다 빈번한 국회 출석, 일선 우체국과 산하기관 현장탐방, 숨가쁜 와중에 잠깐 짬을 낸 배장관을 만나봤다.

―기업인 출신 장관이라 기대가 큽니다. 공직에 임명된 지 한 달이 다됐습니다. 느낌이 남다를 법한데요.

“생각해야 할 것이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공인이라 행동거지가 조심스럽고 외부에 신경쓰이는 것이 많아졌습니다. 기업에도 총수가 있지만 사장이 경영방침을 정하고 밀고 나가면 그만입니다. 장관은 많이 달라요. 전체 정부조직 중 한 부서로서 유기적인 관계를 생각해야 하는데 노하우도 아직 터득하지 못했고 서툰 면이 많습니다. 뭐랄까 새로운 직장에 익숙지 못해 서먹서먹한 그런 기분입니다.”

―국무회의가 달라졌다고 하는데요. 실제 국무위원으로 참여해보니까 어떻던가요.

“밖에서 듣던 것하고 많이 달라요. 김대중(金大中)대통령 스타일이라고 할까요. 매우 자유스럽고 의견개진도 활발합니다. 어떤 때는 장관이 저런 말을 해도 되는건가 하고 놀란 적이 있어요. 아직은 처음이어서 완전한 토론식은 아닌 것 같고 앞으로 상당한 변화가 있을 걸로 봅니다.”

―그동안 재계의 요구와 정부 정책 사이에 괴리가 있어서 업계에서는 불만이 많았습니다. 입각한 후 ‘아하 이것 때문에 안되는구나’하고 느낀 점이 없습니까.

“오해로 생긴 문제가 많았다고 봅니다. 관료사회는 국가 이해를 먼저 생각하고 기업인은 사업의 이익을 먼저 생각합니다. 국가적인 관심사일수록 서로 상충되는 것이 크지 않나 생각됩니다. 이를테면 저는 ‘가급적이면 통신산업은 자유화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과잉투자는 어떻게 하느냐’ ‘내버려두어야 하느냐’ ‘내버려두면 문제가 없느냐’ 이런 논란이 생깁니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칠 수 없는 현실적인 고려라고 할까요, 아무튼 앞으로 양쪽 입장을 고려해 대화로 해결방법을 찾겠습니다.”

그러면서 배장관은 “민간기업인 출신이라서 정치를 잘 모르고 야망도 없다”며 “정치인처럼 유권자의 인기를 끌 필요가 없고 ‘마음’을 비우니까 많은 문제가 저절로 풀리더라”고 말했다. 경제논리로 해법을 찾으면 의외로 답이 쉽게 나온다는 얘기였다.

배장관은 요즘 직원들에게 “정책을 결정하고 추진할 때 적어도 세 번은 ‘왜’라는 질문을 던져보라”며 사고방식의 변화를 주문한다. 행정만능주의나 탁상공론에 빠지기 쉬운 공무원 사회의 이지 고잉(Easy Going)풍조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서다.

그는 “정보통신도 ‘첨단’이라고 무조건 좋은 것이 아니다. 있는 기술과 시설을 잘 활용해 편리한 서비스를 제공하면 그것이 ‘탱크주의’”라고 강조했다.

―작년 상반기만 해도 기업치고 정보통신분야에 진출하지 못하면 ‘팔불출’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국제통화기금(IMF) 날벼락을 맞으니까 갑자기 여러 기업에서 이익도못남기고 돈만들어가는 ‘애물단지’가 됐습니다. 대책이 있습니까.

“IMF시대가 지난 후에 어떻게 변할까 생각해봅시다. 직장에서 쫓겨난 실업자들은 대부분 재취업하고 상당수는 그냥 실업자로 남을 겁니다. 재벌기업은 재무구조가 좋아질 게 분명합니다. 제일 큰 변화는 기업의 경쟁력이 높아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러나 모든 기업이 다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정보기술을 잘 활용해 경쟁력을 높인 기업만 살아남게 됩니다. 정보통신산업의 과잉투자가 문제로 부각되는데 저는 단기간에 많은 투자가 이뤄졌기 때문에 투자효율이 떨어졌다고 봅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현재의 투자가 다 쓸모있다고 생각합니다. 기술개발을 해서 경쟁력을 올리려면 시간과 돈이 필요합니다. 좋은 조건의 자금을 능력있는 사업가에게 마련해주는 게 정부의 역할입니다.”―통신 산업 구조조정을 어떻게 정책적으로 유도할 생각입니까.

“정부는 인위적인 시장개입을 지양하고 뒤에서 지원하는 정책을 펼 겁니다. 기존 사업자에게 필요한 시간을 준 후 단계적으로 시장을 개방하고 통신산업 진입과 퇴출의 규제를 철폐할 작정입니다. 한국통신도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먼저 수익성이 없는 공익사업을 분리한 후 주식매각을 적극 추진할 생각입니다.”

―외국인들이 국내 통신업체에 상당한 매력을 갖고 있습니다. 업계에서도 자금난 때문에 외자유치에 열심입니다. 얼마 전엔 인수위에서 33%인 이동통신분야 외국인 지분제한을 풀자는 주장도 나왔습니다. 장관의 견해는 어떻습니까.

“어차피 우리나라가 IMF체제하에서 외국자본을 끌어올 필요가 있고 적대적 기업인수합병(M&A)을 허용한 이상 지분제한을 풀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신중하게 검토하고 있습니다.”

―요즘 기업마다 당장이 급하니까 ‘장사가 되는 알짜배기 사업’까지 매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IMF체제 이후의 우리 경제에 부담을 주지 않겠습니까.

“산업자본이 투자형태로 들어오는 것하고 독창적인 기술이 팔리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어요. 대상이 라이신 특허기술을 판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 기술이 남아 있다면 앞으로 얼마든지 일자리를 만들 수 있지만 외국으로 넘어간다면 그것으로 끝이죠. 정말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기업을 인수한다면 걱정이 없습니다. 달러를 들여와 투자를 하고 우리 근로자들에게 고임금을 주면 좋은 일 아닙니까. 그들이 고용을 창출하고 국내 시장에서 장사해서 돈도 벌고 한국인 기술자를 많이 육성하면 우리나라에 도움되는 일입니다. 일률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망할 기업은 망해야 경쟁력이 생긴다’는 배장관의 발언이 화제가 됐습니다. ‘견제구’가 없었나요.

“저보다 대통령께서 더 강하고 빨리 가는 것 같아요. 대통령께서 소신있게 하라고 말씀하셨어요. 굉장히 지지해주니까 오히려 부담을 느끼는 편입니다.”

―70, 80년대 성장드라이브 시절에는 관료집단이 경제발전을 선도하며 많은 역할을 했습니다. 과거를 생각하면 좀 억울하겠지만 부패와 규제의 진원지로 관료집단이 몰매를 맞고 변화해야 한다는 요구가 큰 것 같습니다.

“저는 머리좋고 학벌좋은 사람들이 왜 관리를 하는지 가끔 물어보기도 합니다만 관리도 인센티브가 있어야 합니다. 일부 공무원이 도둑질한다고 욕을 먹지만 대다수 관료들은 묵묵히 할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유일하게 하는 일이 ‘애국’밖에 더 있습니까. 저도 IMF 때문에 봉급이 20%나 깎여 관리노릇 오래 하기 힘들겠다고 농담을 합니다(웃음). 공무원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대책이 있어야 합니다. 현실적으로 봉급을 많이 주기는 어렵고 공무원이 국민의 존경을 받을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기업에 있을 때도 그렇게 했지만 본부 직원을 1백명 단위로 묶어 장관과 툭 터놓고 대화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관료사회의 의식혁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얼마 전 우정사업 현장을 둘러봤는데 과잉투자가 많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우편배달집중국만 해도 그래요. 가동률이 50%밖에 안돼요. 민간기업이면 부도날 일입니다. 그런데 책임자는 시설 좋다는 것만 강조합니다. 장관이 가동률을 물어보는 것이 의외라는 표정이에요. 우리나라는 저축률이 30%나 되는데 외국에서 돈을 꾸어옵니다. 과거의 예를 보면 취업인구가 늘어나는 것에 비해 투자가 너무 많아요. 정보통신산업도 비효율을 없애는 것이 선결과제입니다. 한국통신이 통신위성을 띄워놓고 활용을 못해 수천억원의 돈을 우주공간에 낭비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무엇이든 시작할 때는 정부에서 신중을 기하고 일단 결정하면 일부 반대가 있더라도 지지부진하게 시간을 끄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데이콤이 얼마 전 세계적인 언론재벌 루퍼트 머독과 위성방송 합작사를 설립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내년 하반기부터 80여개 위성방송 채널을 한꺼번에 서비스한다는 놀라운 내용입니다. 방송사와 학계에서는 시기상조라고 반대하는데요.

“매체와 채널이 많아지고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외국방송이 들어와 방송시장이 개방되고 있습니다. 방송분야도 시장경제 원리를 바탕으로 민간의 자율과 책임을 확대해야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외국자본의 참여도 우리 방송의 발전에 유리하게 활용하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벤처기업을 육성해야 한다지만 IMF체제를 맞아 중소 소프트웨어업체들이 먼저 무너지고 있습니다. 대학문을 나선 젊은이들이 창업은커녕 취업도 못해 낙담하고 있습니다. 벤처산업을 일으킬 획기적인 대안은 없을까요.

“미국 실리콘밸리에도 벤처기업의 90%가 실패합니다. 나머지 10%만 살아남아 투자액의 20∼30배 수익을 올리는 것이 벤처산업입니다. 국민의 세금인 예산을 벤처기업에 투자하는 것은 도박입니다. 미국에서는 의사 변호사 같은 고액소득자들이 벤처기업에 투자할 때 세금을 감면해주는 방법으로 벤처자금을 늘려갑니다. 우리도 그런 방식을 써볼 때가 됐어요.”

배장관은 MIT대 공학박사답게 평소 인터넷을 자주 사용하고 장관실에 설치된 전자결재시스템도 금방 익힐 만큼 ‘정보화’ 실력파. 부인 신수희(申秀喜)씨는 미술계에서 인정받는 중견화가다.

〈정리〓김학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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