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언대]정호선/「폭탄주 퇴치」 지도층이 앞장서라

  • 입력 1997년 10월 2일 19시 55분


대학에 20년간 재직하다 지난해 4월 국회의원에 당선된 후 정기국회 국정감사에서 말로만 들었던 폭탄주를 처음 접하게 됐다. 분위기에 못이겨 억지로 한잔을 마셨지만 정말 곤혹스러웠다. 저녁식사 자리에서 폭탄주를 돌린다는게 놀랍기만 했다. 바로 며칠전 소관부처의 초청으로 상임위원회 위원들과 저녁식사를 하는 자리에서도 폭탄주가 돌았다. 차례가 돼서 정색을 하고 『도저히 못마시겠다』고 사양했으나 막무가내였다. 강제로 권하면서 폭탄주 몇잔 못하면 바보같이 취급하니 몹시 불쾌하기까지 했다. 1일부터 올해 국정감사가 시작됐는데 폭탄주가 나올까봐 저녁식사 자리가 벌써부터 겁이 난다. 우리 선조들은 예로부터 「지나친 음주는 패가망신의 지름길」이라고 가르쳤다. 그들은 향음주례(鄕飮酒禮)라고 해서 어른 앞에서 술마시는 예의를 배워야만 사회생활을 하면서 결례를 범하지 않는다며 실천했다. 우리 고유의 주도(酒道) 주법(酒法)은 이것이었다. 「끝장보기」 「섞어 마시기」 「접대부 유희」 「고함과 충돌」 등으로 특징되는 오늘의 우리 음주문화는 원래 우리의 것이 아니다. 술자리에 가면 아랫사람에게 무조건 술마시기를 강요하는 잘못된 풍조도 우리 고유의 것은 아니다. 강권통치로 사람들의 가슴을 답답하게 했던 5공 초기 군간부들에 의해 태어났다는 폭탄주를 너도 나도 마시고 심지어는 대학생이 폭탄주 세례에 목숨을 잃는 지경까지 왔다. 정말 지나치다. 경제적 손실은 두말 할 필요도 없다. 외채 원리금을 갚느라 한해에 1백10억달러(약9조5천억원)를 퍼다주는 나라에서 음주로 인한 사회적 경제적 손실이 연간 10조원에 가깝다니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한 나라의 음주량은 사회불안에 비례하고 술의 알코올 농도는 사회혼란과 비례한다」는 말이 있다. 올림픽을 치러냈고 2002년 월드컵 축구대회를 유치한 나라가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폭탄주 공화국」이 됐으니 정말 부끄러운 노릇이다. 더욱이 폭탄주를 애용하는 사람들은 정치인 검찰 군간부 회사간부 교수 언론인 등 주로 우리 사회의 지도층이다. 솔직히 일반 서민들은 그 비싼 양주를 폭탄주로 만들어 마실 기회가 거의 없다. 21세기 이 나라를 이끌 지도자를 뽑는 대선이 곧 치러지고 나라 경제가 시시각각 어려워지고 있는 마당에 폭탄주를 애용하는 지도층이 앞장서 폭탄주 퇴치를 결의하고 실행하는게 어떨까. 정호선(국회의원·국민회의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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