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승지음/창작과 비평사/4천원)
아직도 시는 유장하게, 그리고 격렬하게 살아있다. 시를 쓰던 이, 읽던 이가 모두들 돈과 물건의 숲으로 빨려들어간 이 한심한 세기말의 저잣거리, 아직도 「옛날 자장」같은 시를 만날 수 있다는 안도(安堵)….
시인 정호승이 7년만에 시집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창작과 비평사)를 내놓았다. 산사의 용맹정진하는 스님처럼, 정갈한 자세로 혼을 곧추세우고, 자신을 향하여 채찍질하고 끊임없이 화두(話頭)를 들이대는 듯하다.
「이대로 당신앞에 서서 죽으리/당신의 舍利(사리)로 밥을 해먹고/당신의 눈물로 술을 마신 뒤/희방사 앞마당에 수국으로 피었다가/꽃잎이 질 때까지 묵언정진하고 나서/이대로 서서 죽어 바다로 가리」(「희방폭포」 전문).
유신시대 그리고 80년대, 낮은데 사는 시린 사람들의 삶과 현실에 체온과 시선을 나누던 정호승. 그에게 과연 90년대란 무엇인가.
새 시집에는 정호승식의 십장생(十長生), 예수 하느님 부처(佛) 하늘 바다 바위 죽음 사랑 운명 그리움 따위가 수없이 나타나 십장생도를 그리곤 흩어진다. 그리고 보다 유장해진 목청으로 깨달음을 말한다.
「바위는 모래가 되어/제 이름이 없어지고/강물은 바다에 이르러/제 이름이 없어진다…」(「배가 고프다」에서).
때로는 흘러간 세월을 앓듯 「짐을 내려놓아라/무겁지 않느냐/눈물을 내려 놓아라/마르지 않았느냐」(「외나무다리」에서)고 타이른다. 그러면서 시들은 그의 십장생의 하나, 사랑이라는 주제로 귀착한다. 이 흔들리는 세기말, 「사랑」이란 무엇이냐고.